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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39 기준 최신판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교육개혁을 추진하면서 보통학무국에서 설립한 최초의 소학교.

개설

갑오개혁 때 설치된 학무아문 소속 보통학무국에서 구상하여 1894년 9월 18일에 최초로 근대적 소학교와 사범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소학교는 뒤에 교동소학교가 되는데, 구한말 세도가의 자제들에게 신교육을 전수하기 위해 설립된 황실학교였다. 고등소학교는 한성사범학교가 1895년(고종 32) 5월 1일 개교하면서 한성사범학교 부속 소학교로 개편되었다. 1895년 7월 19일 소학교령(小學校令)이 반포되면서 한성 내에 관립소학교가 설립되었는데, 이들 관립소학교는 그해 8월 8일과 13일 사이에 개교하였다. 관립소학교에서는 심상과(尋常科)와 고등과(高等科)를 두었는데, 심상과를 졸업한 후 고등과에 진학할 수 있었다. 1900년(광무 4)까지 10여 개의 증설을 본 관립소학교에는 심상과만이 개설되어 있었고 고등과의 경우는 교동소학교에만 있었다. 따라서 고등과가 있던 교동소학교를 다른 관립소학교와 구별하여 고등소학교로 불렀던 것이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교육개혁을 추진하면서 과거의 교육기관이었던 예조를 폐지하고 학무아문(學務衙門)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학무아문 소속의 보통학무국에서 근대적 소학교와 사범학교를 설립하고 관장할 것이 구상되었다. 최초의 사범학교와 소학교는 1894년 9월 18일에 전(前) 광무국(礦務局) 자리에서 개교하였다. 근대식 학제로 설립된 최초의 관립소학교였던 교동초등학교의 『교동국민학교90년사』에 따르면, 이 소학교(뒤의 교동소학교)는 구한말 세도가의 자제들에게 신교육을 전수하기 위해 설립된 황실학교였는데, 한성사범학교가 1895년 5월 1일에 개교하면서 한성사범학교 부속 소학교로 개편되었다. 따라서 교동소학교 학생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1987년 1월 11일 교동 고등소학교에서 수하동 관립소학교 학생 12명을 받아들였을 때, 고등소학교의 학생 30여 명이 이에 반발하여 물러났다는 기사는 이를 뒷받침한다. 다른 관립소학교와 등급을 같이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이 교동 고등소학교는 이후의 관립소학교의 설립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이에 힘입어 관립소학교의 설립 작업도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한편 관립소학교는 1895년 7월 19일 칙령 제145호로 반포된 근대식 학제 ‘소학교령’에 바탕을 두고 설립되었다. 정부는 1895년 7월 26일 처음으로 한성 내의 관립소학교 건립을 위한 첫 광고를 냈고, 이들 관립소학교들은 1895년 8월 8일에서 13일 사이에 개교하였다. 1897년 당시 관립소학교는 한성사범학교 부속소학교인 교동소학교를 비롯하여 9개교였다. 1900년도 관립소학교 예산에 의하면 1900년 당시 10개의 관립소학교가 있었다. 1906년(광무 10) 9월 1일 ‘학부직할보통학교 명칭’(학부령 24호) 공포 당시에는 교동(校洞), 재동(齋洞), 인현동(仁峴洞), 수하동(水下洞), 정동(貞洞), 매동(梅洞), 미동(渼洞), 어의동(於義洞), 안동(安洞), 경교(京橋), 주동(鑄洞), 양현동(養賢洞), 양사동(養士洞) 등 13개의 소학교로 증설되었다.

조직 및 역할

관립소학교에는 심상(尋常), 고등(高等)의 2과(科)가 있었고, 수업연한은 심상과의 경우 3년, 고등과의 경우 2년 내지 3년으로 규정되었다. 심상과를 졸업한 후 고등과로 진학할 수 있었다. 1900년까지 10여 개의 증설을 본 관립소학교에는 심상과만이 개설되어 있었고 고등과의 경우는 교동소학교에만 있었다. 그러나 취학률이 저조했기 때문에 심상과의 경우는 이후에도 각 지방에 속속 설립되고 있지만 고등과의 경우는 증설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등과가 있던 교동소학교를 다른 관립소학교와 구별하여 고등소학교로 불렀던 것으로 판단된다. 1899년(광무 3) 2월 1일자 『독립신문』에 게재된 예산안 중 한성사범학교 2,790원 밑에 고등소학교 740원이 계상되어 관립소학교 4,020원과 구별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소학교령’에 의하면 심상과의 교과목은 수신(修身), 독서, 작문, 습자(習字), 산술(算術), 체조로 구성되었다. 때에 따라 이들 교과목 중에 체조를 제외할 수 있었고, 본국 지리, 본국 역사, 도서(圖書), 외국어 중 한 과목 혹은 여러 과목을 추가할 수 있었다. 또한 여학생을 위해 재봉을 가할 수 있었다. 고등과의 경우는 수신, 독서, 작문, 습자, 산술, 본국 지리, 본국 역사, 외국 지리, 외국 역사, 이과, 도서, 체조로 구성되었고, 여학생을 위해 재봉을 첨가할 수 있었다. 역시 때에 따라 외국어 한 과목을 추가할 수 있었고, 또한 외국 지리, 외국 역사, 도서 중 한 과목 혹은 여러 과목을 제외할 수 있었다.

관립심상소학교는 가장 기초적인 교육기관으로 졸업 후 고등과로 진학할 수 있었다. 또한 고등과는 중학교의 하위 교육기관으로 고등과 졸업생들은 중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제도는 초보적인 국민교육을 보다 고도의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장치였다. 중학교에는 기본적으로 고등소학교 졸업자가 진학할 수 있었지만, 17세 이상 25세 이하 신체 건강한 자 중에서 별도로 마련된 입학시험을 치른 자도 입학할 수 있었다.

변천

관립소학교 고등과에서는 1899년부터 1906년까지 8회에 걸쳐 총 139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하지만 심상과 졸업생에 대해 고등과 졸업생의 비율은 해를 거듭할수록 감소했다. 지배층의 민중교육에 대한 의식이 ‘교화’의 정도에 머물러 있었으며,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교육만을 실시한다는 의식수준을 넘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심상소학교에서 고등소학교로의 진학률은 낮았고, 고등소학교의 설립도 확대되지 못했다. 심상과 졸업생 대비 고등과 졸업생의 비율이 제1회에서 제9회까지 각각 45.1%(14명), 제2회 13.5%(15명), 20.8%(15명), 53.3%(16명), 29.0%(16명), 22.5%(16명), 32.1%(26명), 24.4%(21명)에 불과했다. 이러한 낮은 진학률은 신교육에 대한 무관심과 신교육의 부진으로 인해 근대 국민교육이 성공하기 어려웠던 당시의 상황을 보여 주는 것으로 근대 국민국가 형성을 위한 인재 육성에 커다란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1905년 6월 27일 학부(學部)가 고등소학교 증설을 위해 교사 신축비 4,254원(元)을 상주한 것은 이러한 낮은 진학률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에서 이루어진 조치였다(『고종실록』 42년 6월 27일).

참고문헌

  • 『고종시대사』3집, 고종 32년 7월 19일, 「칙령 제145호 소학교령을 반포하다」
  • 『독립신문』 1887년 1월 14일자; 1899년 2월 1일자
  • 『황성신문』 1900년 9월 29일자; 1904년 8월 10일자; 1905년 10월 9일자
  • 노인화, 「대한제국 시기 관립학교 교육의 성격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9.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http://db.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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