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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함경도 경성 지방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경성부(鏡城府)는 1432년(세종 14) 설치되어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경성군으로 변경되기까지 함경도 북부 지역의 행정과 군사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경성에는 북병영(北兵營)을 설치하여 북병사(北兵使)가 부사(府使)를 겸임하였다. 13도제의 시행과 함께 경성군으로 바뀐 이후에도 함경북도의 수부(首府) 지위는 계속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본래의 명칭은 우롱이(亏籠耳) 혹은 목랑고(木郞古)이다. 오랫동안 여진(女眞)에게 점령되었다가 1107년(고려 예종 2)에 윤관(尹瓘)이 여진을 쫓아내고 이곳에 성을 쌓았다. 뒤에 원(元)나라에 편입되었는데, 공민왕이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회복하며 되찾았다.

조선이 건국된 뒤 1398년(태조 7)에 동북면(東北面)의 주(州), 부(府), 군(郡), 현(縣)의 이름을 나누어 정할 때 비로소 지금의 이름인 경성(鏡城)이라 부르며 군을 설치하고 장관으로 지군사(知郡事)를 두었다(『태조실록』 7년 2월 3일). 1400년(정종 2)에 병마사(兵馬使)가 지군사를 겸임했다. 1403년(태종 3)에 읍성을 쌓고, 이듬해인 1404년(태종 4) 병마사를 도병마사(都兵馬使)로 고치고 판군사(判郡事)를 겸하게 하였다. 1432년 읍치를 석막(石幕)으로 옮기고,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켜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로 판부사(判府使)를 겸임하게 하고, 비로소 판관(判官)과 토관(土官)을 두어 절제사의 본영(本營)으로 삼았다. 1467년(세조 13)에 병마도절제사를 북도절도사(北道節度使)로 명칭을 바꾸고, 그대로 부사(府使)를 겸임하게 했다. 이로써 함경도에는 경성의 북병영(北兵營), 북청(北靑)의 남병영(南兵營)이라는 남북 병영 체제가 성립하였다(『세조실록』 13년 9월 4일).

조직 및 역할

종2품의 북병사 즉 함경북도병마절도사가 도호부사를 겸임하였다. 북병사는 함경북도의 군사 업무에 전념하므로 문관 종5품의 판관이 경성부의 행정 업무를 보좌하였다. 임기는 30개월이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소속된 이속(吏屬)으로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3명, 보민도감(補民都監) 1명, 창감관(倉監官) 13명, 풍헌(風憲) 7명, 군관(軍官) 3명, 병방군관(兵房軍官) 2명, 도무(都務) 1명, 봉무별장(烽武別將) 1명, 지구관(知彀官) 2명, 기고관(旗鼓官) 2명, 파총(把摠) 2명, 초관(哨官) 9명, 성장(城將) 4명, 치총(雉摠) 10명, 군기감관(軍器監官) 2명, 아전(衙前) 94명, 지인(持印) 40명, 사령(使令) 34명, 관노(官奴) 57명, 관비(官婢) 1백 1명이 있었다.

남쪽 지방과 달리 함경도와 평안도에는 토관으로 몇 개의 행정 기구가 설치되었다. 경성의 토관직으로는 우선 도무사(都務司)에 종5품의 도무, 정6품의 교부(校簿) 및 정7품의 전사(典事) 각 1원을 두었다. 전례서(典禮署)에 종5품의 장부(掌簿), 정7품의 전사와 종8품의 급사(給事), 종9품의 섭사(攝事) 각 1원을 두었다. 융기서(戎器署), 사창서(司倉署), 영작서(營作署)에 각각 종6품의 감부(勘簿), 정8품의 관사(管事), 종9품의 섭사 각 1원을 두었다. 수지국(收支局)에 종7품의 장사(掌事)와 종9품 섭사 각 1원을 두었다. 전주국(典酒局)에 급사, 섭사 각 1원을 두었다. 사옥국(司獄局)에 섭사 2원을 두었다. 이상은 문관으로 관찰사가 본도 출신 중에 후보자를 추천하였다.

이 밖에 무관 토관직도 설치되었다. 진봉위(鎭封衛)에 정5품의 여직(勵直), 종5품의 부여직(副勵直) 각 1원, 정6품의 여과(勵果), 종6품의 부여과(副勵果), 정7품의 여정(勵正), 종7품의 부여정(副勵正) 각 2원, 정8품의 여맹(勵猛), 종8품의 부여맹(副勵猛) 각 3원, 정9품의 여용(勵勇) 4원과 종9품의 부여용(副勵勇) 5원을 두었다. 무관 토관직은 절도사가 본도 출신 중에 후보자를 추천하였다. 토관이 경관(京官)으로 임명될 때에는 문반과 무반 모두 1품계를 강등하여 적용하였다. 토관은 퇴관(退官)할 차례가 되었어도 나이 60세가 되어서야 퇴직하였다.

경성의 관할 행정구역으로는 『여지도서』에 6사(社)가 소개되어 있다. 관아가 소재한 오촌사(吾村社)를 위시하여 용성사(龍城社), 주을온사(朱乙溫社), 주촌사(朱村社), 어랑사(漁郞社), 명간사(明澗社)가 있었다.

변천

1756년(영조 32)에 판관을 없애고 부사로 승격시켰다가 1758년(영조 34)에 다시 북병사가 부사를 겸임하고 판관을 설치하였다. 1884년(고종 21)에 북병사에게 안무사(按撫使)를 겸임하게 하여, 직함의 공식 명칭을 함경북도안무사겸병마수군절도사(咸鏡北道按撫使兼兵馬水軍節度使)로 하고 함경북도의 수부 역할을 맡도록 하였다(『고종실록』 21년 윤5월 5일).

1895년 대구역주의인 8도제가 소구역주의인 23부제로 바뀔 때에도 경성부는 23부에 포함되어, 산하에 경성(鏡城)·부령(富寧)·길주(吉州)·명천(明川)·경원(慶源)·경흥(慶興)·온성(穩城)·종성(鍾城)·회령(會寧)·무산(茂山) 등 10개 군을 관할하였다(『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이듬해인 1896년(고종 33) 전국을 13도 8부 1목 331군으로 개편할 때 함경북도의 수부 지위는 유지하였지만, 경성의 행정구역이 군으로 변경되면서 경성부라는 기구는 폐지되었다(『고종실록』 33년 8월 4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손정목, 『한국지방제도·자치사연구(상)』, 일지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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