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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영동 북부의 고성 지방을 다스리던 지방 관아. 조선시대 고성 지방을 관할하던 관청 및 행정기구.

개설

고성군은 신라 경덕왕 때 고성군으로 편제되었다가, 고려초에 고성현으로 간성현이 통합 편제되었다. 1389년(고려 공양왕 1)에 고성과 간성이 분리되면서 군으로 승격되었고, 조선 세종대 이후로 군으로 지속되었다. 1895년(고종 32) 23부제에서 강릉부 산하의 군으로 편제되었고, 이듬해 13도제에서 강원도 산하의 군으로 편제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구려에서는 달홀(達忽) 또는 달홀주(達忽州)라고 하였다. 568년(신라 진흥왕 29) 신라의 북방 영토 확장 정책에 따라 달홀주로 편제되면서 군주(軍主)가 배치되었다. 이는 신라가 지금의 삼척 지방인 실직주(悉直州)와 지금의 강릉 지방인 하슬라주(河瑟羅州)에 군주를 파견한 데 이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어서 경덕왕 때의 행정개편에서 고성군으로 승격되었다.

고려 995년(고려 성종 14)에 10도제에서 삭방도(朔方道)의 고성현으로 편제되었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고성현으로 간성현의 영현이 통합 편제되었다. 1389년(고려 공양왕 1)에 군으로 승격되면서 고성과 간성은 분리되어 독자적인 행정체계로 편제되었다가 이후 현으로 강등되었다.

조선 1413년(태종 13)에 8도제에서 강원도 고성현으로 편제되었고, 세종 때에 고성군으로 승격되었다. 1455년(세조 1)에 군익도(軍翼道) 체제에 따라 고성도(高城道)를 설치하고, 고성은 중익(中翼)으로, 간성은 우익(右翼)으로, 통천과 흡곡을 좌익(左翼)으로 편제하였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7년(세조 3)에 군익도 즉 3익(三翼) 체제를 폐지하고 거진(巨鎭)을 설치하는 진관(鎭管) 체제에서 간성진(杆城鎭)을 설치하여 고성·통천·흡곡 등을 관장하였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1743년(영조 19) 군수(郡守) 살해 사건이 일어나 현으로 강등되었으며(『영조실록』 19년 2월 13일), 이후 1752년(영조 28) 다시 군으로 승격되었다(『영조실록』 28년 7월 25일).

조직 및 역할

조선후기 읍지에 따르면, 조선초기 고성군에는 군수와 훈도(訓導) 각 1인을 배속하였고, 그 예하에 좌수(座首) 1인, 별감(別監) 2인, 군관(軍官) 12인, 아전(衙前) 41인, 지인(知印) 20인, 그리고 사령(使令) 8명, 관노(官奴) 27명, 관비(官婢) 21명을 두었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향장(鄕長) 1인, 순교(巡校) 4인, 서기(書記) 7인, 통인(通引) 2인, 그리고 사령 6명, 사동(使童) 2명, 사용(使傭) 2명을 두었다.

여기서 군수는 목민관으로서 고성군의 행정·사법·치안·재정 등을 총체적으로 관장하였고, 그 예하 조직은 이·호·예·병·형·공 등 6방 관속으로서 행정실무를 담당하였다.

변천

1895년(고종 32)에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추진된 8도제 폐지와 23부제 체제에서 강원도는 춘천부와 강릉부로 편제되었다. 아울러 부제의 하부조직으로 군현제를 폐지하고 군제로 일원화하였다. 이때 고성은 강릉부 산하의 군으로 편성되었다. 이듬해 23부제 폐지와 13도제로의 행정개편에서 춘천부와 강릉부는 다시 강원도로 편제되었고, 고성군은 강원도 산하의 군으로 편성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관동읍지(關東邑誌)』
  • 『관동지(關東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강원도·고성군, 『고성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강릉대학교박물관, 1995.
  • 고성문화원, 『고성군 읍지』, 강원일보사,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