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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에서 한강을 건너 남태령을 넘어 과천을 지나 수원 이남으로 가는 여정에 있던 나루.

개설

동작진(銅雀津)은 서빙고(西氷庫)와 노량(鷺梁) 사이에 위치하였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나루인 관도(官渡)가 아닌 사진(私津)이어서 관도처럼 진장(鎭將)이 주재하며 진선(津船)이 설치된 곳은 아니었다. 한강에는 한강, 서빙고, 동작, 노량, 양화(楊花) 5곳에 나루가 있었다. 조선후기 수도 방위 체제에서는 금위영(禁衛營)이 동작진과 노량진을 관리하였다.

호서와 호남에서 진위(振威)를 거치는 자는 모두 동작진을 이용했고 영남 및 호서, 호남에서 판교를 거치는 자는 모두 한강진을 건넜다. 진위에서 올 때 동작진을 이용하면 당일 한양에 올 수 있었다. 그런데 동작진은 수심이 깊고 물살이 험해 험탄(險灘)이라고 불렸다. 배가 침몰하는 패선(敗船)의 재난도 자주 발생하여 익사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도 과천에서 오는 사람들은 동작진을 통해 도성으로 오는 것이 빨라서 이곳을 이용하였다. 과천에서 양재역(良才驛)을 거쳐서 오는 길은 평탄하지만 4~5리를 돌아서 오는 것이었다. 이에 통행의 편리를 위해 물길이 위험했는데도 나루를 운영하였다.

명칭 유래

동작진은 동자개나루라고 하는데, 이는 동재기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동작진의 한강 건너편 땅에서 구릿빛이 많이 보여 붙은 이름이다.

형성 및 변천

동작진은 정조대에 이르러 수원에 화성(華城)이 건설되고 현륭원(顯隆園)이 조성되면서 왕 행행로(行幸路)의 한 구간이 되었다. 창덕궁을 출발한 어가가 숭례문을 지나 한강을 건넌 뒤 과천을 거쳐 수원으로 가던 원행(園幸)에서는 동작진 인근의 서빙고를 이용했는데 그곳이 순탄한 물길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서빙고에는 농선(農船)만 있었고 행인이 건너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동작진 인근을 거쳐 강을 건너는 것은 위험하고 시간이 많이 소요되므로 노량진을 도강한 후 시흥을 거쳐 수원으로 향하는 새로운 원행로를 만들었다. 이 길이 오늘날 국도 1호선이다.

1857년(철종 8)에 왕이 인릉(仁陵)에 능행할 때는 배다리[舟橋]를 동작진에 설치하였다(『철종실록』 8년 1월 9일).

위치 비정

한강의 서빙고와 노량진 사이에 위치한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한경지략(漢京識略)』
  • 나각순, 『서울의 성곽』,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4.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의 하천』,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0.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지명사전』,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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