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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32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 함경도 종성부에 위치한 산.

개설

오갈암(烏碣巖)은 함경도 종성부에 있는 산으로, 조선전기부터 오갈암 봉수가 있었다. 1607년에 오갈암 일대에서 누르하치[奴兒哈赤, 老乙加赤]와 포점태(布占泰)가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누르하치가 승리하여 두만강 유역 여진인에 대한 영유권을 차지하였다.

명칭 유래

현지인들은 까마귀가 서 있는 모양의 바위라고 하여 오갈암이라고 한다.

위치 비정

『대동여지도』와 『동여도』 등 여러 고지도를 통해 오갈암의 위치는 지금의 함경북도 종성군 삼봉 지역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오갈암 전투가 벌어진 곳은 종성군 삼봉 지역과 그 맞은편인 용정(龍井) 개산둔(開山屯) 일대이다.

관련 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오갈암은 원래 함경도 종성부에 소속된 봉수로 나온다. 즉, 이곳은 종성부 남쪽으로 21리(약 8.2㎞) 지점에 있고, 북으로 삼산(三山)봉수, 남으로 방원보(防垣堡)봉수와 인접한다.

오갈암이 역사에 전면적으로 등장한 것은 누르하치와 관련이 있다. 1603년부터 오랍(烏拉)의 포점태가 두만강 유역을 공격하여 상당한 피해를 입혔고, 재침한 1605년에는 조선을 압도하였다. 함경도병마절도사(咸鏡北道兵馬節度使)김종득은 같은 해 5월에 포점태군이 주둔한 건가퇴(件加退)를 공격하였다가 대패하였다. 조선은 포점태에게 주도권을 넘겨주었고, 포점태의 침입으로부터 주변의 번호(藩胡)를 지켜주지 못하였다. 이에 포점태에게 끝까지 대항했던 현성(縣城)의 번호들은 누르하치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1607년에 누르하치는 군대를 보내 현성을 구원하였다(『선조실록』 40년 2월 6일)(『선조실록』 40년 2월 19일)(『선조실록』 40년 3월 17일). 누르하치 군이 현성의 번호를 데리고 돌아가는 길에 오갈암 맞은편 문암에 대기하고 있던 포점태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는데, 이것이 ‘오갈암 전투’이다. 당시 포점태 군은 1만이었고, 누르하치 군은 약 1,200명으로 병력 차이가 컸다. 그러나 양고리(楊古利) 등의 분전으로 누르하치 군이 승리를 거두었다(『선조수정실록』 40년 2월 1일).

이 전투를 계기로 누르하치는 현성의 번호를 비롯한 동해여진(東海女眞)을 복속하였으며 이들의 전투력을 바탕으로 명과 대적할 수 있었다. 반면 조선은 200여 년간 번호로 구축하였던 두만강 유역의 여진인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오갈암 전투는 작게 보면 두만강 유역 번호의 향배를 결정하였고, 크게 보면 동아시아사의 흐름을 바꾼 역사적 의미를 갖는 중요한 일전이었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만주실록(滿洲實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청사고(淸史槁)』
  • 『난중잡록(亂中雜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동여도(東輿圖)』
  • 박정민, 『조선시대 여진인 내조 연구』, 경인문화사, 2015.
  • 유소맹 저, 이훈·이선애·김선민 역, 『여진 부락에서 만주 국가로』, 푸른역사, 2013.
  • 稻葉岩吉, 『光海君時代の滿鮮關係』, 大阪屋號書店,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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