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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32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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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갑곶진 |
한글표제 | 갑곶진 |
한자표제 | 甲串津 |
상위어 | 강화부(江華府), 제물진(濟物鎭), 진무영(鎭撫營) |
동의어 | 갑곶(甲串), 갑곶진(甲串鎭), |
관련어 | 갑곶돈대(甲串墩臺), 수군(水軍), 월곶진(月串鎭), 어영청(御營廳), 보장처(保障處), 초지진(草芝鎭) |
분야 | 경제/교통/수운 |
유형 | 지명 |
지역 | 경기 강화도/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문광균 |
관할 지역 | 강화도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갑곶진(甲串津)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지리지 경기 부평 도호부 강화 도호부, 『효종실록』 6년 1월 17일 |
조선시대 경기 내륙 지역에서 강화도로 들어오는 나루.
개설
강화도는 고려 왕조 이래 국가 보장처(保障處)로서 조선의 방어 체제에서 주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보장처는 유사시 국왕이 대피하는 곳으로 왕이 곧 국가의 상징인 조선에서 대단히 중요시 여기는 곳이었다. 갑곶진(甲串津)은 경기 내륙에서 강화도로 들어오는 통로에 위치하고 있어 조정의 주요 관리 대상이 되었다. 이후 병인양요(丙寅洋擾)와 신미양요(辛未洋擾) 당시 서양 군대의 주요한 진입로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형성 및 변천
갑곶진이 언제 설치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에 세종대부터 갑곶에 대한 기록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갑곶(甲串)은 강화부 동쪽에 있고 나룻배가 있으며 나루머리에 연미정(燕尾亭)이 위치해 있다고 하였다(『세종실록』 지리지 경기 부평 도호부 강화 도호부).
갑곶진이 전략적으로 중요해진 것은 임진왜란 직후부터였다. 후금(後金)의 등장으로 명(明)이 쇠퇴하자 이를 대비하기 위해 국가 방어 체제 정비에 힘을 쏟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부각된 것이 강화도였다. 임진왜란 이후 국력이 쇠락해 있던 조선의 입장에서는 유사시 도성 자체를 방어하는 데 상당한 부담이 있었다. 이로 인해 조선에서는 각 지역에 보장처를 만들고, 전시에 이곳으로 이동하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당시 보장처로서 여러 지역이 논의되었지만, 강화도와 남한산성(南漢山城) 두 곳이 가장 적합한 곳으로 간주되었다. 특히 강화도는 황해도 및 충청도와 연결되어 있어 전란 시 고립되지 않을 뿐 아니라, 염하(鹽河)라고 하는 물살이 빠른 해협과 인접하고 있어 경기 내륙으로부터의 침입을 막는 데도 효율적이었다. 이로 인해 강화도는 보장처 중 으뜸으로 꼽혔다.
조선 국왕은 유사시가 되면 강화도로 이동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강화도는 국가가 우선적으로 방비하는 곳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정묘호란(丁卯胡亂) 당시 인조는 통진(通津)을 지나 갑곶에서 배를 타고 강화도로 들어갔다. 병자호란 때는 강화도로 들어가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후 효종 연간 내륙에 있던 수군진이 강화도로 이설되고 육군진이 설치되면서 강화도의 방어 체제가 강화되었다. 효종 연간에는 갑곶진에 대한 구체적인 조치가 있었는지 알기 어렵지만, 강화도 방어 체계에서 연미정과 함께 갑곶이 가장 중요한 요충지라고 인식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효종실록』 6년 1월 17일), 일정 정도 군사 방어 시설 정비 조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종 연간 강화도 방어 체제는 일대 변동을 겪는다. 강화도에 있는 수군진이 육군진으로 바뀌거나 폐지되면서 강화도의 방어 체제는 수군 중심에서 육군 중심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1678년(숙종 4) 강화도 방어 체제를 담당할 사령부로서 진무영(鎭撫營)이 설치되고, 다음 해인 1679년(숙종 5) 강화도 연해 지역 53개 처에 돈대(墩臺)가 설치되면서 강화도의 육군 방어 체제는 크게 강화되었다. 이때 돈대는 어영군(御營軍) 3,000인과 함경·황해·강원 등 3도 승군(僧軍) 8,000인을 동원하여 40일 만에 축조하였다. 돈대는 망루와 포루의 역할을 할 수 있게 설계된 누대로 강화도 연해 지역을 둘러싸고 설치되었다. 이때 갑곶진에도 돈대가 들어섰다. 갑곶돈은 돈대 주위가 113보(步)였고 성벽 위에 낮게 쌓은 성가퀴인 치첩(雉堞)은 40개였다. 이 갑곶돈대는 제물진(濟物鎭)의 관리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1694년(숙종 20) 갑곶진과 마주 보는 곳인 문수산에 문수산성(文殊山城)이 설치되면서 갑곶진의 방어 태세는 더욱 강화되었다.
갑곶진은 1866년(고종 3) 병인양요(丙寅洋擾)의 발발과 더불어 역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했다. 강화도로 진격한 프랑스군 600명은 갑곶진에 상륙하여 문수산성을 공략하는 한편 강화성을 점령하였다. 또한 신미양요 당시에는 미국 군함에 올라간 박상손, 최순복, 유운집 세 사람이 갑곶에서 참수되고 효수되기도 하였다. 1875년(고종 12)에는 갑곶돈에 갑곶포대가 설치되었다. 이후 1876년(고종 13)에 일본의 전권대신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가 6척의 함선을 이끌고 와 이곳으로 상륙한 뒤 운요호 사건의 책임을 물어 강압적으로 조선의 접견대관 신헌(申櫶)과 강화도조약(한일수호조규, 병자수호조약)을 맺었다.
위치 비정
갑곶진의 위치는 오늘날의 행정 구역으로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해안동로 1366번 길 35이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강도지(江都誌)』
- 배성수, 「肅宗初 江華島 墩臺의 축조와 그 의의」, 『朝鮮時代史學報』27, 朝鮮時代史學會, 2003.
- 송기중, 「17세기 수군방어체제의 개편」, 『조선시대사학보』53, 朝鮮時代史學會, 2010.
- 송양섭, 「17세기 江華島 방어체제의 확립과 鎭撫營의 창설」, 『韓國史學報』13, 高麗史學會, 2002.
- 이홍두, 「병자호란 전후 江都의 鎭堡설치와 관방체계의 확립」, 『인천학연구』9,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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