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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32 기준 최신판



명나라 시기 요동도지휘사사에 속하였던 군사적 요충지의 명칭.

개설

광녕(廣寧)은 금나라 때부터 등장하지만 이 지역이 중요하게 작용한 시기는 명나라 때였다. 명나라는 요동 지역을 관리하기 위하여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를 설치하였는데, 이 소속의 광녕은 바다와 육로가 모두 가까워 경제적·군사적인 요충지로 자리 잡았다.

자연 환경

광녕의 서쪽으로는 의무려산(醫無閭山)이 있었다. 남쪽으로는 바다와 인접하였다. 동쪽으로는 로하(路河)가 있고 동북쪽으로는 주자하(珠子河)가 있었는데, 하류에서 모두 요하(遼河)로 흘러 들어갔다. 또 서쪽에는 판교하(板桥河)가 있는데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갔다.

형성 및 변천

광녕이라는 지명이 등장하는 시기는 금나라 때부터였다. 금나라는 요나라를 정복한 이후 지방행정 체제를 로(路)-부(府)-주(州)-현(縣)의 4단계로 나누었다. 1123년에는 요나라 때의 현주(顯州)를 승격시켜 북경로(北京路) 소속의 광녕부(廣寧府)로 삼았다. 그 아래에 여양(閭陽)·망평(望平)·광녕·종수(鍾秀)의 4현을 두었다. 원나라 때에는 광녕부로(廣寧府路)를 설치하고 여양·망평 2현을 두었다.

명나라 때에는 광녕이 요동도지휘사사에 속하였으며, 1393년(홍무 26) 광녕위(廣寧衛)를 설치하였다가 이후 폐지와 설치를 반복하였다. 광녕은 명나라 시기에 최고 군정기관의 주둔지로써 동북 지역의 여진인들을 관리하는 기지 역할을 하였다. 또한 정치의 중심,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을 뿐만 아니라 동북 지역의 백성들이 경제·문화적인 교류 활동을 하는 데 매우 번성한 곳이었다. 이후 후금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광녕 지역은 분쟁 지역이 되었다. 청나라 때에는 1664년(강희 3) 광녕부를 설치하고 영원주(寧遠州)·금현(錦縣)·광녕현을 관할하도록 하였다. 바로 다음 해에 부(府)를 옮겨 치소(治所)를 금주부(錦州府)에 두었다. 이로부터 광녕현은 금주부의 관할로 들어가게 되었다.

위치 비정

현재 중국 요녕성(遼寧省) 금주시(錦州市) 북진(北鎭) 지역.

관련 기록

광녕은 조선의 사신들이 명나라를 다녀오는 길에 경유하는 지역이었으며, 군사적인 요충지였기 때문에 조선의 사신들은 이곳에서 명나라와 주변국의 정세를 살펴 귀국한 뒤에 보고하는 일이 많았다(『세조실록』 1년 8월 8일).

또한 명나라가 여진이나 몽골과 계속 충돌하는 지역이었고 조선 변계와도 매우 가까운 지역이었으므로, 조선에서는 광녕과 주변 지역의 형세를 계속해서 살피면서 방어 대책을 세우는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성종실록』 11년 8월 18일).

조선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임진왜란 시기에는 광녕을 비롯한 주변 지역에서 많은 수의 군사를 지원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25년 9월 23일).

명·청 교체기 광녕은 명의 주요한 대 후금 방어 대상 지역이었다. 명은 경리(經理)양호(楊鎬)를 광녕도어사(廣寧都御史)에 제독(提督)마귀(麻貴)가 광녕총병(廣寧總兵)에 임명하여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광해군일기』 2년 4월 17일). 그러나 1619년 심하지역(深河之役)에서 벌어진 사르후([薩爾滸], Sarhu) 전투에서 후금군에 패한 후 1621년에는 요양성을 빼앗겼고, 이듬해 광녕마저 함락되었다(『광해군일기』 14년 4월 18일).

조선에서는 이후에도 광녕을 둘러싼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인조실록』 4년 8월 26일)(『인조실록』 5년 5월 21일)(『인조실록』 5년 7월 1일).

참고문헌

  • 『금사(金史)』
  • 『명사(明史)』
  • 『성경강역고(盛京疆域考)』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