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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6년에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하면서 도읍한 성.

개설

흥경은 중국 요녕성(遼寧省) 무순시(撫順市) 신빈현(新賓縣) 영릉진(永陵鎭)의 소자하(蘇子河) 남쪽에 있는 성이다. 누르하치[奴兒哈赤, 老乙加赤]는 건주여진(建州女眞)을 통일하던 시기에 구노성(舊老城, [Feala])에 거주하였다. 1587년에 누르하치가 혁도아랍(赫圖阿拉, [Hetuala])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1603년에 이주하였다. 이곳은 후금(後金)을 건국할 때인 1616년부터 요양(遼陽)으로 천도한 1622년까지 수도였다. 이후 청(淸) 왕조는 1659년에 혁도아랍의 이름을 흥경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흥경을 자신들의 발원지로 존중하였고, 현재도 성곽과 건축물의 일부가 남아 있다.

명칭 유래

흥경은 원래 『청태조실록』, 『만주실록』 등 초기 자료에 한자로 혁도아랍(赫圖阿拉), 만주어로 허투알라(Hetuala)로 기재되어 있었다. 만주족이 입관(入關)하여 청을 건국한 후 허투알라는 청 왕조가 발흥(發興)한 곳이라는 뜻에서 흥경이라고 불렸다(『영조실록』 11년 5월 26일). 조선에서는 노성(老城)으로 부르기도 하였다(『선조실록』 38년 8월 10일) (『광해군일기』 1년 10월 13일) (『광해군일기』 2년 2월 1일) (『숙종실록』 12년 3월 13일) (『숙종실록』 23년 6월 3일).

자연 환경

흥경의 서쪽 약 15㎞ 지점에 현재의 신빈현 시가지가 위치한다. 동쪽으로 누르하치의 선조, 즉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의 능인 영릉(永陵)이 약 5㎞ 지점에 있다. 남쪽으로 누르하치가 세력을 확장할 때 거주하던 구노성이 있다. 흥경성 북쪽으로 소자하가 동에서 서로 흐르고 있다. 흥경성 서쪽에 소자하와 이도하(二道河)가 합류하고, 이 지역에 비교적 넓은 평야가 있다.

위치 비정

요녕성 무순시 신빈현 영릉진 노성촌에 있고, 지금은 관광지로 개발되어 있다.

관련 기록

『조선왕조실록』에는 흥경이 주로 조선후기에 등장한다. 이때는 청에서 흥경을 특별 관리하고 있을 때였다. 따라서 조선에서 이와 관련된 상징적 의미를 기술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즉, 청 개국의 터전이기에 흥경이 되었다는 것과 추존(追尊)한 사세(四世)의 능(陵)인 영릉(永陵)이 이곳에 있다는 것이다(『영조실록』 11년 5월 26일) (『순조실록』 5년 3월 15일).

청에서 흥경을 중시하였기에 황제가 이곳을 순행하거나 관료를 파견하였다. 흥경은 조선으로부터 비교적 가까운 곳이었기에 조선 조정은 중국 측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조선은 황제인 건륭제(乾隆帝) 혹은 관료가 흥경으로 향한다는 정보를 수집하기에 이른 것이다(『정조실록』 2년 6월 1일) (『정조실록』 7년 2월 27일) (『정조실록』 9년 4월 19일). 이와 같은 기사를 통해 흥경과 심양(瀋陽), 영고탑(寧古塔) 등과의 거리, 주변 역로, 흥경과 동북 지역 주요 거점의 거리 및 역로를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정조실록』 2년 6월 1일).

참고문헌

  • 『성호사설(星湖僿說)』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청실록(淸實錄)』
  • 『만주실록(滿洲實錄)』
  • 한명기,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푸른역사, 2009.
  • 패멀라 카일 크로슬리 저, 양휘웅 역, 『만주족의 역사 : 변방의 민족에서 청 제국의 건설자가 되다』, 돌베개, 2013.
  • 譚其驤, 『中國歷史地圖集』第七冊, 中國地圖出版社, 1982.
  • 유지원, 「누르하치 興起時期 都城에 나타난 滿·漢文化의 相互作用」, 『명청사연구』22, 2004.
  • 유지원, 「누르하치와 赫圖阿拉(Hetu ala)城」, 『명청사연구』11, 1999.
  • 이훈, 「17-18세기 淸朝의 滿洲地域에 대한 政策과 認識 : 건륭기 만주족의 위기와 관련하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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