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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31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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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백기 |
한글표제 | 백기 |
한자표제 | 伯耆 |
동의어 | 백기국(伯耆國) |
관련어 | 조취번(鳥取藩), 인번주(因幡), 안용복(安龍福), 울릉도쟁계(鬱陵島爭界) |
분야 | 정치/외교/외교사안 |
유형 | 지명 |
지역 | 일본 |
시대 | 조선후기 |
왕대 | 숙종 |
집필자 | 장순순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백기(伯耆)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숙종실록』 20년 8월 14일, 『숙종실록』 21년 6월 20일, 『숙종실록』 22년 9월 25일, 『숙종실록』 22년 8월 29일 |
일본 산음도에 속한 지방.
개설
정식 명칭은 백기국(伯耆國)으로, 현재의 조취현(鳥取縣) 서부 지역에 해당한다. 동쪽은 인번국(因幡國)으로 조취현의 동부 지역이며, 서쪽으로는 도근현(島根縣)의 출운국(出雲國), 남쪽으로는 강산현(岡山縣)의 미작국(美作國)·비중(備中國)과 광도현(廣島縣)의 비후국(備後國)에 접하였으며, 북쪽으로는 우리나라의 동해에 접한 곳이었다.
내용 및 변천
강호시대(江戶時代)에 백기국은 인번국(因幡國)과 함께 조취번(鳥取藩)에 속하였다. 조취번은 1600년 관원(關ヶ原) 전투 후 강산번의 지전(池田) 가문의 종가초대(宗家初代)에 해당하는 지전휘정(池田輝政)의 동생 지전장길(池田長吉)이 60,000석으로 영지를 수여받은 곳이었다.
조취번은 지전휘정을 시작으로 지전가(池田家) 일족이 지배하는 곳이어서 강호시대 초기에는 막부의 정치적인 판단과 필요에 따라 희로번(姫路藩) 또는 강산번과의 전봉(轉封)에 의하여 번주가 서로 교체되기도 하였다. 또한 지전가문은 지전휘정와 덕천가강의 차녀 독희(督姬) 사이에서 태어난 충웅(忠雄)의 가계(家系)라는 이유로 외양(外樣) 대명(大名)이면서 송평(松平)이라는 성과 덕천가의 문장을 받았고, 친번(親藩)에 준하는 가격(家格)을 부여받았다.
1617년 조취번의 2대 번주 지전장행(池田長幸)이 비중송산번(備中松山藩)으로 전봉되고, 희로번 2대 번주 지전이융(池田利隆)의 장남인 지전광정(池田光政)이 320,000석을 부여받아 조취번에 입봉하여 조취성주(鳥取城主)가 되었다. 그리하여 인번국과 백기국은 모두 조취번령(320,000석)이 되고, 1632년 덕천가강의 외증손이며, 강산번주였던 지전광중(池田光仲)이 광정과 교체하여 번주가 된 이후 명치유신(明治維新)에 이르기까지 인번국과 백기국은 조취 지전가(池田家)의 지배하에 있었다. 1871년에 있었던 폐번치현(廢藩置縣)으로 조취현의 관할이 되었다. 현재의 조취현 중서부와 도근현 동부의 일부 지역에서는 ‘백기’를 포함하는 지명이나 유적이 다수 남아 있었다.
조선시대에 무인도나 다름없던 울릉도(일본에서는 죽도(竹島))는 대나무를 비롯한 육지의 물산과 전복 등의 해산물이 풍부한 섬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러한 울릉도의 경제적 가치는 조선의 연해민은 물론 일본의 산음(山陰) 지방, 즉 동해에 면하고 있는 지금의 조취현(鳥取縣), 도근현(島根縣) 지역 사람들에게도 알려져 있었다. 그 결과 17세기 초반부터는 일본인들의 울릉도 도해가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백기에 거주하던 어민들이 울릉도에서 고기를 잡다가 우리나라의 연해에 표류해 오기도 하였다(『숙종실록』 20년 8월 14일).
일본 측에서 울릉도에 잠재된 경제적인 가치에 주목하여 처음 공식적인 움직임을 취한 것이 조취번 미자(米子)에 기반을 둔 대곡(大谷) 가문과 촌상(村上) 가문이었다. 해상 운송업(廻船業)에 종사하였던 대곡심길(大谷甚吉)은 1617년 월후(越後)에서 귀환하던 중 우연히 울릉도에 표착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이 섬이 무인도이며 취할 만한 토산품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 대곡심길은 본거지인 조취번 미자고로 귀환한 후 본격적으로 울릉도 도항을 계획하게 되었다. 막부로부터 1625년 ‘죽도도해면허(竹島渡海免許)’를 발급받게 되면서 이후 대곡·촌상 두 가문은 이 죽도도해면허를 근거로 삼아 매년 교대로 울릉도에 도해하였다.
두 가문이 울릉도에 획득한 산물 중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 것은 전복이었고, 그 외 해삼, 버섯, 목재, 바다사자 기름[魚油]과 간 등이 있었다. 두 가문은 4~5년에 한 번씩 강호에서 장군(將軍)을 직접 알현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받아 장군을 비롯하여 막부의 요인들에게 엄청난 양의 울릉도산 전복을 헌상하였을 뿐 아니라(『숙종실록』 21년 6월 20일), 강호는 물론, 조취 번주, 미자 성주에게도 헌상하였고, 번주나 요인들의 주문에 응하여 상업을 영위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해서 두 가문은 막부에 의하여 울릉도 도해가 금지되는 17세기 말까지 약 70년 동안 울릉도 도항을 계속한 결과 조취번 내에서 특권 상인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두 가문의 울릉도 도해에 문제가 생긴 것은 1692년(숙종 18)과 1693년 울릉도에서 조선인들과 조우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조선인들의 출현으로 울릉도에서 어로 행위를 할 수 없게 되자 대곡 가문의 선원들은 울릉도 해역에서 자신들의 어업권이 침해당하였다고 판단하여 조선인의 울릉도 도해를 금지해 줄 것을 막부에 호소하기 위한 증인으로 안용복(安龍福)과 박어둔(朴於屯)을 미자로 납치해가서 백기에 있는 조취번청에 사건의 처리를 요청하였다.
조취번은 대곡과 촌상 두 가문의 울릉도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막부에 조선인의 울릉도 도해를 금지해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막부는 대조선교섭을 담당하고 있던 대마번에게 두 조선인의 송환과 조선인의 죽도(울릉도) 도해 금지를 조선 정부에 요청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안용복과 박어둔은 장기(長崎)와 대마번(對馬藩)을 거쳐 1693년 12월에 조선으로 송환되었다.
막부의 지시를 받은 대마는 이전부터 일본이 말하는 죽도가 조선의 울릉도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조선에 대하여 울릉도를 일본령으로 인정하게 하려는 태도를 취하였다. 즉, 조취번 미자 어민들의 어업권 확보를 위하여 조선인들의 울릉도 도해 금지를 요청하라는 막부의 지시를 비정상적인 외교관행을 동원하면서까지 쟁점화시킴으로써 울릉도의 일본령화를 시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교섭은 난항을 거듭하게 되고 마침내 조선은 울릉도는 조선의 영토로 죽도는 울릉도와 한 섬이며, 일본인의 울릉도 도해를 금지하라는 내용의 외교문서를 발급함으로써 대마번이 조선으로부터 얻어 내고자 하였던 것과는 정반대의 답변을 내놓았다. 교섭이 점차 고착 상태에 빠지자 대마번은 그간의 교섭 경과를 막부에 보고한 뒤 막부의 지시를 받아 조선과 교섭하기로 하고, 1695년 10월 전 번주 종의진(宗義眞)이 에도에 도착하여 그간 조선과 주고받은 왕복문서를 제출하고 막부와 교섭 방침에 관한 협의에 들어갔다.
한편 막부 측은 조취번에 12월 24일부로 일종의 ‘질의서’를 보내 죽도의 소속에 관해 문의하였는데, 조취번은 죽도는 인번(因幡), 백기(伯耆)에 속하지 않으며, 죽도(울릉도)·송도(독도) 외에 인번과 백기에 부속된 섬은 없다는 답변을 제출하였다. 이로써 막부는 이듬해인 1696년 1월 대마번과 조취번에 일본인의 울릉도 도해를 금지한다는 내용의 ‘죽도도해금지령(竹島渡海禁止令)’을 내림으로써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령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 이러한 막부의 ‘죽도도해금지령’은 그해 10월이 되어서야 조선에 알려지게 되는데, 그사이인 5월에 안용복 등 조선이 10여 명이 배를 타고 은기(隱岐)에 도착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숙종실록』에 따르면 안용복의 도일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이라는 사실을 ‘백기주태수(伯耆州太守)’, 즉 조취 번주와 막부에 재확인받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숙종실록』 22년 9월 25일). 1696년 안용복의 도일 사실은 그해 6월 2일 조취번청에 보고되었고, 이후 조취번의 강호번저를 통해서 막부에게도 전해졌다. 그러나 안용복의 귀국은 대마번의 방해로 조일간의 표류민 송환시스템이 아닌 조취번으로부터의 추방 형식으로 이루어졌고, 8월 29일에 강원도 양양현으로 돌아오게 되었다(『숙종실록』 22년 8월 29일). 울릉도를 둘러싼 조선과 일본의 일련의 논쟁을 ‘울릉도 쟁계(鬱陵島爭界)’라 하였다.
참고문헌
- 『조취현사(鳥取縣史)』
- 윤유숙, 「근세 돗토리번(鳥取藩) 정인(町人)의 울릉도 도해」, 『한일관계사연구』42, 한일관계사학회, 2012.
- 장순순, 「17세기 조일관계와 ‘울릉도 쟁계(鬱陵島 爭界)’」, 『역사와 경계』 84, 경남사학회,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