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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31 기준 최신판



일본 기내(畿內)의 일부 지역으로 근기(近畿) 지방의 중앙과 남쪽의 인근 지역을 일컫던 옛 지명.

개설

내랑시대부터 명치(明治)시대 초기까지 일본의 지리 구분의 기본단위였던 국(國)의 하나로 기내 지역에 있었으며, 일본열도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을 일본 최초의 통일 정권인 대화(大和) 정권 발생의 본거지로 보아 일본 전체를 의미하는 용어로도 사용하였다.

명칭 유래

현재의 내랑현 천리(天理)시 남쪽에 있었는데, 원래는 산길 주변에 있었던 작은 지역의 명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인덕(記仁德)』에는 왜(倭)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였다. 『화명류취초(和名類聚抄)』에 대화향(大和鄕)이 나오는데 천리시에 근접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대화 지역을 다스리는 호족인 대화국조(大和國造)가 나온 것으로 간주되며, 이후 국호(國號)인 대화로 발전하였다.

형성 및 변천

비조(飛鳥) 시기에 화국조(和國造)로 표기하였으며, 비조·내랑 시기에 걸쳐서는 대왜국(大倭國)·대화국(大和國)으로 보인다. 729~749년에는 15개 군(郡)을 관할하는 대화국이 확립되었다. 1180년(명종 10) 겸창(鎌倉)막부의 장군 원뢰조(源賴朝)는 대화지역의 군사와 민정을 감독하는 직책인 수호(守護)직을 흥복사(興福寺)에 위임하였다. 이후 후제호천황(後醍醐天皇)의 막부토벌 활동으로 대화는 남북조(南北朝) 동란(動亂)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대화는 『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장하는데, 1451년 대화의 태수(太守)가 조선에 사자를 보내 토산물을 바치기도 하였다(『문종실록』 1년 1월 23일). 1462년(세조 8)에는 실정(室町)막부의 장군 족리의정(足利義政)이 조선에 토산물을 바치며 서계를 보내 대장경을 요구하며 일본의 수도를 대화라고 칭하였다(『세조실록』 8년 10월 9일). 전국(戰國)시대에는 통정순경(筒井順慶) 등의 전국대명(戰國大名)들이 대화 수호를 역임하였다. 관원(關ケ原) 전투 이후 강호(江戶)시대에는 대화의 직할지를 내랑봉행(奈良奉行)이 지배하였지만 1664년 내랑대관소(奈良代官所)가 신설된 뒤에는 지배권이 이관되었다. 1871년에 명치(明治) 신정부에서 번(藩)을 폐지하고, 지방통치기관을 중앙정부가 통제하는 부(府)와 현(縣)으로 일원화한 폐번치현(廢藩置縣)을 시행하면서 내랑현이 성립되었다.

위치 비정

현재의 내랑현 천리시 남쪽 지역에 해당한다. 북쪽은 기내의 산성국(山城國: 현 경도부(京都府)), 서쪽은 기내의 하내국(河內國: 현 대판부(大阪府)), 동쪽은 동해도(東海道)의 이하(伊賀: 현 삼중현(三重縣))·이세(伊勢: 현 삼중현), 남쪽은 남해도(南海道)의 기이국(紀伊國: 현 화가산현(和歌山縣))과 접해 있다.

관련 기록

『기인덕(記仁德)』 『화명유취초(和名類聚抄)』

참고문헌

  • 『日本大百科全書』, 小學館, 1987.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9.
  • 吉田茂樹, 『日本地名大事典』, 新人物往來社, 2004.
  • 三省堂編修所, 『日本地名事典』, 三省堂, 2007.
  • 平凡社地方資料センタ,『日本歷史地名大系』, 平凡社,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