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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31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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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박다 |
한글표제 | 박다 |
한자표제 | 博多 |
동의어 | 나진(那津), 냉천진(冷泉津), 도안(道安), 박석(泊潟), 엽형(葉形), 우형(羽形), 우편(羽片), 외항(外港), 축자대진(筑紫大津), 탄진(灘津), 팔각도(八角島), 패가대(覇家台), 화욱탑(花旭塔), 황진(荒津) |
관련어 | 복강(福岡) |
분야 | 정치/외교/사행 |
유형 | 지명 |
지역 | 일본 |
집필자 | 장순순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박다(博多)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정종실록』 2년 8월 21일, 『태종실록』 1년 9월 29일, 『성종실록』 16년 5월 4일 |
일본 구주 북부 축전국 지역의 지명으로, 현재의 복강현 복강시 지역.
개설
박다는 넓은 의미로는 박다만(博多灣) 연안 일대로 현재의 복강시 연안부에 상당하는 지역을 말하며, 좁은 의미로는 일본 근세의 박다(博多, 동쪽은 석당천(石堂川), 서쪽은 나가천(那珂川), 남쪽은 박다역(博多驛) 부근, 북쪽은 박다만(博多灣))를 가리켰다. 고대에는 태재부(太宰府)의 외항(外港) 역할을 하였다. 실정시대에는 일본의 주요 무역항으로 번창하여 많은 박다 상인이 명·조선·유구와의 무역에 종사하였다.
명칭 유래
나진(那津)·황진(荒津)·탄진(灘津)·냉천진(冷泉津)·축자대진(筑紫大津)이라고도 불리었다. 중국의 사서에는 패가대(覇家台)·화욱탑(花旭塔)·팔각도(八角島)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속일본기(續日本記)』의 759년 기록에 나오는 박다대진(博多大津)이 ‘박다’라는 지명이 처음 보이는 예이다.
신숙주의 『해동제국기』(1471년)에는 “축전(筑前)에 박다가 있는데, 혹은 패가대로, 혹은 석성부(石城府)로, 혹은 냉천진으로, 혹은 거기진(莒崎津)으로도 일컫는다”라고 되어 있다.
‘박다’의 유래에 대해서는 “토지가 넓고[博], 사람과 물산이 많다[多]”라는 말에서 ‘하카타[박다]’, 큰 새가 날개를 펼친 것 같은 지형에서 비롯되어 ‘우형(羽形, [하카타])’, 해외에서 오는 배가 정박하는 포구라 하여 ‘박석(泊潟, [하카타])’, 활에 맞은 학의 날개가 떨어졌다고 해서 ‘우편(羽片, [하카타])’, 베어진 큰 나무의 잎이 흩날린 데에서 비롯되어 ‘엽형(葉形, [하카타])’이라고 했다는 등의 설이 있다. 이 당시의 하카타는 현재의 박다만에 면하는 일대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형성 및 변천
고대에는 태재부의 외항 역할을 하였다. 중세에는 상업항으로 번창하였다. 14세기 후반부터 왜구가 창궐하면서 구주탐제(九州探題) 금천료준(今川了俊)은 왜구의 진압을 대가로 박다를 거점으로 하여 고려와 조선과 교섭을 하였다. 1419년(세종 1) 대마도 정벌(조선에서는 기해동정(己亥東征), 일본에서는 응영의 외구[應永の外寇])을 계기로 박다를 거점으로 하는 구주탐제 삽천씨(澁川氏)가 한때 조선과의 무역에서 우위에 있었지만, 후에 대마도의 종씨(宗氏)가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실정시대에는 일본의 주요 무역항으로 상인들이 명·조선·유구와의 무역에 종사하였다. 상인들은 승려를 보내 조선에 예물을 바치고 왜구 등에게 잡혀간 조선인을 돌려보냈으며, 종종 대장경을 요청하는 등(『정종실록』 2년 8월 21일)(『태종실록』 1년 9월 29일) 한반도와 대단히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실정시대에 박다의 무역상인을 대표하는 인물로 초기에는 비부(肥富), 중기에는 종금(宗金), 후기에는 도안(道安)을 들 수 있다.
이들 중 도안은 3회에 걸쳐서 조선 표류민 송환을 위한 유구국사(琉球國使)로 조선에 도항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조선과 통교하게 되면서 1455년(세조 1)에 조선 정부로부터 일종의 통교허락증인 도서(圖書)를 받아 수도서인(受圖書人)이 되고, 정축년(1457)에는 수직인(受職人)이 되었다. 도안의 아들인 임사야문(林沙也文) 또한 1470(성종 1)에 아버지인 도안을 따라 내조하여 수직을 받고 수직인이 되었다(『성종실록』 16년 5월 4일).
1587년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전란으로 황폐해진 박다를 부흥시키고 구역을 나누어 북부의 박다빈(博多浜) 해안과 남부의 식빈(息浜) 해안이 통합되어 근세 도시 박다가 되었다. 그러나 풍신수길이 이와 같은 조치를 취한 데에는 임진왜란의 병참기지를 만들기 위한 것에 목적이 있었다.
강호시대에 흑전장정(黑田長政)은 홍로관(鴻臚館) 자리에 박다성을 축조하고, 구(옛) 박다 지역을 정비하여 성시마을(城下町)로 만들고, 520,000석이 소출되는 규모의 지배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옛 박다 지역은 승형문(桝形門)으로 옛 복강 지역과 연결되어 상인의 거리로 획정되었다. 명치시대(明治時代)에 들어와 박다와 복강을 합병하여 1889년 4월 1일 복강시가 되었으며, 박다의 지명은 박다구(博多區)로 남아 있다.
참고문헌
-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 강재언, 「키타규슈[北九州]에서 본 한·일 교류에 대한 고찰-1419년「응영의 외구」[己亥東征]에 대한 하카타[博多]의 대응을 중심으로」, 동북아시아문화학회 국제학술대회 발표자료집, 2002.
- 田中健夫·石井正敏, 『對外關係史辭典』, 吉川弘文館, 2008.
- 武野要子, 『博多-町人が育てた國際都市-』, 岩波新書,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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