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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06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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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사천지패 |
한글표제 | 사천지패 |
한자표제 | 泗川之敗 |
동의어 | 사천지전(泗川之戰), 사천(泗川) 전투 |
관련어 | 경관(京觀), 선진리왜성(船津里倭城), 사천신성(泗川新城), 정유재란(丁酉再亂) |
분야 | 정치/군사·국방/전쟁 |
유형 | 사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방기철 |
발생시기 | 1598년(선조 31) 9월 20일~1598년 10월 1일 |
발생장소 | 경상남도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
관련 인물/집단 | 동일원(董一元), 도진의홍(島津義弘), 정기룡(鄭起龍)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사천지패(泗川之敗)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선조수정실록』 31년 10월 1일 |
1598년 9월 20일부터 10월 1일까지 조명연합군과 일본군이 경상남도 사천시 주변에서 벌인 전투.
개설
사천은 정유재란 당시 호남에서 후퇴한 일본군이 일본 본토로 철수하기 위해 집결한 곳이었다. 일본군은 사천왜성을 중심으로 동서로 길게 뻗은 형태로 주둔하였다. 사천은 일본군의 호남 진출을 막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인 1592년 5월 29일 이순신은 사천 앞바다에서 거북선을 앞세워 일본 군선 13척을 격파한 바 있다. 이를 사천해전이라고 부른다.
정유재란 때에도 일본군은 사천왜성을 중심으로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형태로 주둔하고 있었다. 따라서 사천 지역을 조명연합군이 확보하게 되면 일본군을 분산·고립시킬 수 있었다. 이에 조명연합군은 육군뿐 아니라 수군도 합세하여 사천에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사천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이 패배함에 따라 조명연합군이 계획했던 공격작전은 차질을 빚었다. 반면 승리를 거둔 일본군은 순천왜성에 고립되어 있던 소서행장(小西行長)을 도울 수 있었고, 일본으로 퇴각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게 되었다.
역사적 배경
명과 일본 간의 강화협상이 결렬되면서 1597년(선조 30) 1월 일본군이 다시 조선을 침략하여 정유재란이 시작되었다. 한성을 향해 북상하던 일본군은 9월 직산 전투에서 패한 후 사천과 울산·순천 등 3개 지역에 성을 쌓고 장기 농성 태세에 돌입했다. 그중에서도 사천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은 진주·하동·함양·산청·거창 등의 경상도 지역과 장수 등 전라도 지역을 약탈하였다. 한편 8월 18일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사망하자 일본군은 은밀히 철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명의 군문(軍門) 형개(邢玠)는 군대를 4개로 나누어 배치하고 동시에 진격하여 일본군을 섬멸한다는 사로병진작전(四露竝進作戰)을 세웠다. 구체적으로 마귀(麻貴)는 가등청정이 지키고 있는 울산왜성, 동일원(董一元)은 도진의홍(島津義弘)이 지키고 있던 사천왜성, 유정(劉綎)은 소서행장이 주둔 중인 순천왜성을 공격하게 했던 것이다. 이와 함께 해상에서 진린(陳璘)이 거느린 수군이 가세하여 일본군의 상호 구원을 차단하면서 동시 공격하는 작전을 구사하였다(『선조수정실록』 31년 10월 1일).
발단
일본의 도진의홍은 사천 선진리왜성(泗川船津里倭城), 즉 사천신성(泗川新城)에 8,000~10,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주둔하고 있었다. 또 진주남강 연안의 망진채(望晉寨)·영춘채(永春寨)·곤양채(昆陽寨) 등에 1,000여 명, 기존에 있던 사천성에 2,000여 명의 병력을 배치하였다.
사천 지역의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해 편성된 조명연합군은 동일원이 이끈 명군과 정기룡(鄭起龍)이 거느린 조선 군사가 중심이었다. 명군은 성주에서 고령을 거쳐 진주로 향하였다.
1598년(선조 31) 9월 20일 명군의 선봉군이 진주남강을 지키던 일본군을 급습하였고, 일본군은 도주하여 곤양채를 거쳐 사천성에 합류하였다. 20일에는 명군이 망진채와 영춘재를 점령하였다. 그러자 도진의홍은 사천성의 군사를 선진리왜성으로 불러 모아 병력을 집중시키려 하였다. 사천성의 일본군이 선진리왜성으로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던 28일 정기룡이 지휘하는 조선군이 야간에 기습을 감행하였고, 사천성에 있던 일본군은 선진리왜성으로 달아났다.
경과
10월 1일 오전 조명연합군은 선진리왜성에 집결한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명의 유격장 팽신고(彭信古)가 거느린 군사가 화포 사격을 집중하면서 동문으로 접근하였지만 일본군의 저항에 막혀 사상자가 급증하였다. 그런 가운데 명군은 큰 나무 기둥을 이용하여 성안에 진입할 수 있는 길을 만들었다. 바로 그때 명군 진지에서 화포가 오발되면서 탄약고가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명군이 당황하고 있는 가운데 일본군은 성 밖으로 나와 공격해 왔고, 결국 명군은 큰 타격을 입었다. 뿐만 아니라 진주 방면으로 후퇴하면서 남강을 건널 때에는 많은 군사가 강에 빠져 목숨을 잃기도 했다. 결국 명군은 삼가-합천을 거쳐 성주로 퇴각하였다.
사천성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은 3,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는 큰 패배를 당했다. 패배의 원인은 조명연합군이 일본군을 경시한 반면 일본군이 충분한 대비를 하였기 때문으로 여겨지고 있다. 또 조명연합군의 수는 29,000여 명으로 추산되는데, 일본군은 15,000~12,000여 명이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같이 병력의 차이가 있었으나 성에 의지하여 방어전을 편 일본군은 충분히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사천성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조명연합군 시신의 머리를 베어 한곳에 묻고 봉분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봉분을 경관(京觀)이라고 명하였다. 경관은 시체를 쌓고 그 위에 흙으로 봉하여 전공을 표하는 것이다. 따라서 조명연합군의 머리로 만든 봉분은 그들의 전공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명군은 11월 다시 사천 지역 공격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선진리왜성에 머물던 일본군은 11월 16일 부산으로 철수하였고, 이튿날 명군은 텅 비어 있는 선진리왜성을 점령하였다.
참고문헌
- 『난중잡록(亂中雜錄)』
- 김강식, 『문화교섭으로 본 임진왜란』, 선인, 2014.
- 류재성, 『한민족전쟁사』Ⅲ, 국방부군사연구소, 1996.
- 이상훈, 「정유재란시 사천지역의 전투와 조명군총의 조성」, 『한국중세사연구』20, 한국중세사학회, 2009.
- 이장희·성대경·신해순, 「임진왜란시 사천전투와 그 전적지 조사」, 『군사』19,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89.
- 村井章介, 「도진사료(島津史料)로 본 사천전투」, 『남명학연구』8,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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