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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06 기준 최신판



1644년 심기원이 주동하여 회은군이덕인을 추대하려다 발각된 역모.

개설

1644년(인조 22) 인조반정의 1등 공신 심기원(沈器遠)이 주도하여 회은군(懷恩君)이덕인(李德仁)을 추대하려다가 발각된 역모 사건이다. 황익(黃瀷)·이원로(李元老) 등은 심기원이 병자년의 치욕 이후 인조의 미온적 태도에 불만을 품고 이같은 상황을 타개하고자 역모를 모의하게 되었다고 고변하였다. 훈국(訓局) 대장(大將)구인후(具仁垕) 등의 재빠른 조치로 심기원 일당은 일망타진되었다. 심기원은 역모 사실을 부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구인후, 황익 등은 역모 진압의 공으로 영국공신에 봉해졌다.

역사적 배경

심기원은 유생(儒生) 출신으로 이귀(李貴) 등과 협력하여 인조반정의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봉해진 인물이다. 병자호란 시에는 유도대장(留都大將)에 임명되어 한양 방어의 책임을 맡았으나 실패하였고, 다시 제도도원수(諸道都元帥)에 임명되었으나 별다른 전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종전 이후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를 적극적으로 구원하지 않은 죄로 탄핵을 받아 유배당하였다. 최명길(崔鳴吉)과 신경진(申景禛)의 적극적 천거로 1639년(인조 17)에 귀양에서 풀려나 다음해 김자점(金自點)과 함께 호위대장(扈衛大將)에 임명되었다. 1640년(인조 18)에는 남한산성수어사(南漢山城守禦使)에 임명되었다(『인조실록』 18년 4월 8일). 이후 병조 판서를 역임하였고, 1642년(인조 20)에는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으로 승진하였다. 다음해 사은사(謝恩使)로 청(淸) 나라에 다녀왔다. 1643년(인조 21)에는 대사헌홍무적(洪茂績)으로부터 정승의 신분으로 비루하게 수어사를 겸직하면서 방납(防納) 비리에 연루되어 사사로운 욕심을 채웠다는 탄핵을 받고, 좌의정에서 물러났다(『인조실록』 21년 10월 26일). 한편, 당시 심양(瀋陽)에 끌려와 있던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청과 본국 조선의 접점을 찾기 어려운 요구 사이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더욱이, 청은 자신들의 요구가 원활히 관철되지 않을 경우에는 인조의 친조(親朝)와 소현세자에 대한 양위(讓位)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인조를 압박하곤 하였다. 따라서 인조와 소현세자 사이에도 점차 미묘한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이었다.

발단

1644년 3월 21일, 부사직(副司直) 황익과 오국별장(五局別將) 이원로 등이 심기원이 전 지사(知事)이일원(李一元), 광주부윤(廣州府尹)권억(權澺) 등과 모반하여 회은군이덕인을 추대하려고 한다고 고변하였다. 고변을 접수한 훈국 대장 구인후는 김류(金瑬)와 상의한 뒤 즉각 군사를 동원하여 역모의 연루자들과 심기원을 차례로 체포하였다. 고변자 황익은 심문 과정에서, 심기원이 병자년의 치욕 이후 인조의 미온적 대처에 불만을 품고서 휘하의 군사와 광주부의 별아병(別牙兵)을 동원하여 말로만 청류(淸流)라고 자처하는 무리들을 몰아낸 뒤 전부 무신(武臣)으로 조정을 채우고 회은군이덕인을 추대하려 했다고 말하였다(『인조실록』 22년 3월 21일). 황익은 심기원이 원래 인조를 상왕(上王)으로 모시고 심양에서 나온 소현세자에게 양위시키는 방안도 강구하였으나, 세자가 응하지 않을 것 같아 시도하지 않았다는 진술도 덧붙였다. 연루자로 지목된 남영초관(南營哨官) 정형(鄭蘅)은 심기원이 조선 해안에 출몰하는 당선(唐船), 즉 명(明)나라 배와 합류하여 심양을 공략하려 했다고 진술하였다. 심기원은 고변자 황익과의 대질 심문에서 자신이 당선의 대거 도래시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걱정한 바 있었고, 나라의 안보를 염려하여 군사를 양성하려고 시도한 것은 맞지만 역모를 도모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고 부인하였다(『인조실록』 22년 3월 21일).

경과

그러나 심기원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심기원과 권억 등 주모자는 즉시 처형되었다. 회은군이덕인은 역모에 단순히 추대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다. 1642년(인조 20) 명나라로 도주할 때 심기원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임경업(林慶業)도 이 역모와 관련된 것으로 의심을 받아 후일 청(淸)에서 소환되어 고문을 받다가 사망하였다(『인조실록』 23년 12월 28일). 심기원과 친분이 있던 이시백(李時白)·이시방(李時昉) 형제 역시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소문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한편, 이 역모 사건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구인후·김류·황익·이원로 등은 영국공신(寧國功臣)에 봉해졌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인조의 소현세자에 대한 의심과 불만은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김용흠, 『조선후기 정치사 연구 1, 인조대 정치론의 분화와 변통론』, 혜안,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