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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06 기준 최신판



1583년 두만강 북쪽 지역의 여진 추장 니탕개가 조선의 함경도 아산보와 경원진 일대를 대규모로 침입했던 사건.

개설

니탕개(尼湯介)는 자신의 부족 등을 규합해 대규모로 아산보(阿山堡)와 경원진(慶源鎭) 일대를 침입했다. 당시 조선의 변방 장수들의 횡포와 여진족 내부의 세력 다툼이 원인이었다. 니탕개와 조선의 전투는 장장 7개월 동안 진행되었다. 당시 니탕개 세력의 규모는 최대 3만여 기에 달했다. 그리고 전투의 과정에서는 양군의 충돌뿐만 아니라 외교적 교섭이 진행되기도 했다. 하지만 외교적 교섭은 조선과 니탕개 양측에서 원하는 바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방안을 도출하지 못했다. 결국 니탕개군은 방원보(防垣堡) 전투에서 조선군에 크게 패배했다. 방원보 전투를 마지막으로 니탕개의 난은 종료되었다.

역사적 배경

함경도두만강 북변에는 다양한 여진 세력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조선의 영향력하에 있던 여진 세력도 있었지만 조선과 적대적 관계에 있는 세력도 존재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적대 세력의 침입과 약탈을 억제하고 방어하는 것이 국방의 관건이었다.

16세기 말 여진 세력은 부족 간에 노예와 재산, 토지 등을 약탈하면서 관계가 악화되고 있었다. 이 와중에 누르하치([奴兒哈赤], Nurgaci, ᠨᡠᡵᡤᠠᠴᡳ)는 자신의 세력을 키우면서 여진 세력 사이의 분쟁에 참여했다. 더욱이 여진 세력들은 당시 흉년 때문에 경제적으로 곤궁한 상황이었고, 조선 장수들로부터도 다양한 압력을 받고 있었다.

경과

니탕개의 부대는 처음 공격했던 아산보 전투에서 승리한 기세를 타고 1만여 기의 규모로 경원진을 공격했다. 하지만 경원진 주변은 산맥과 하천 등이 발달되어 있어 대규모 병력이 이동하거나 주둔하기에 마땅한 곳이 아니었다. 그리고 조선군 역시 아산보 전투와는 달리 조직적으로 대응했다(『선조수정실록』 16년 2월 1일). 열흘 후 니탕개 부대는 다시 1만여 기를 동원해 훈융진(訓戎鎭)을 공격해 왔다. 훈융진 역시 방어시설이 체계적으로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니탕개는 다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소강상태가 지속되었으나 니탕개가 3개월 후 종성진(鐘城鎭)을 침입하면서 2차 전투가 시작되었다. 2차 전투는 종성진 일대만이 아니라 회령(會寧)과 경원 일대까지 전선이 확대되면서 규모가 확장되었다. 조선군은 두만강 일대에 있는 방어 거점을 모두 방어하려다가 병력이 분산되고 말았다(『선조수정실록』 16년 5월 1일). 니탕개군은 이 상황을 놓치지 않고 공격해 조선군의 방어벽을 뚫었다. 그런데 니탕개와 관계가 좋지 않던 여진 세력이 그의 근거지를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니탕개는 승전의 기회를 잡았지만 근거지를 방어하기 위해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니탕개군은 다시 동관진(潼關鎭)을 공격했지만 이번에도 다른 여진 세력이 배후를 공격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정보를 파악하고 퇴각했다. 그리고 조선은 니탕개군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이미 적의 주요 침투로에 방어 병력을 배치해 두었다(『선조수정실록』 16년 2월 1일).

두 번의 전투에서 패배했던 니탕개는 조선 측에 타협안을 제시했다. 조선에서 자신을 침입자로 대하지 않는다면 전투를 중지하고 물러가겠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니탕개의 본심을 신뢰할 수 없다며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니탕개는 다시 조선에 항복을 요청했지만 조선에서는 받아들이지 않고, 그를 잡아서 죽이려다가 실패한다.

니탕개는 다시 군사를 정비해 방원보를 공격했다. 방원보는 동쪽 일부를 제외하고는 성 전체가 천연 장애물로 둘러싸인 요새였다. 방원보 동쪽에는 두만강의 하천이 흐르고 있었고, 남동쪽으로는 산맥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지형을 무리하게 공격했던 니탕개군은 조선군의 체계적인 반격에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니탕개는 방원보 전투에서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1583년(선조 16) 정월부터 7개월에 걸쳐 진행되었던 니탕개의 난은 방원보 전투를 마지막으로 종료되었다.

참고문헌

  • 강성문, 「조선시대 여진정벌에 관한 연구」, 『군사』18, 국방부 전사편찬연구소, 1989.
  • 김구진, 「조선전기 대여진 관계와 여진사회의 실태」, 『동양학』14,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1984.
  • 송우혜, 「조선 선조조의 니탕개란 연구」, 『역사비평』72, 역사비평사, 2005.
  • 윤호량, 「선조 16년(1583) ‘니탕개의 난’과 조선의 대응」, 『군사』82,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2.
  • 최호균, 「조선중기 대여진 관계의 연구」,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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