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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05 기준 최신판



1812년(순조 12) 4월 홍경래의 난 주동 세력을 평안북도의 정주성에서 진압한 사건.

개설

1811년(순조 11) 12월에 홍경래(洪景來)·우군칙(禹君則) 등의 주도로 평안도 지역에서 대규모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약 5개월간 지속된 이 봉기는 1812년(순조 12) 4월 정주성(定州城)에서 농성 중이던 반란 세력이 관군에 의해 진압됨으로써 막을 내렸는데, 이것을 국가에서는 서적평정(西賊平定)이라고 지칭하였다.

역사적 배경

조선후기 사회는 17·18세기 이후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농업기술의 발전으로 1인당 경작 능력이 늘어나자 농민들은 경작지의 규모를 확대하였다. 시장의 확대라는 변화된 여건 속에서 봉건 지주와 자작농은 물론이고 일부 소작농도 차경지(借耕地)의 확대를 통해 자본을 축적하여 지주로 성장해 갔다. 지주가 늘어나는 반면 많은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몰락하여 지주에 고용된 임금 노동자로 전락하거나 아예 농촌을 떠나게 되었다. 유민화(流民化)된 농민 중 대다수는 도시로 옮겨 가 상공업에 종사하거나 임금 노동자가 되었으며, 일부 농민은 광산이나 포구의 임금 노동자로 전락하였다.

생산력의 증대를 배경으로 전국적인 시장이 형성됨에 따라 개별적으로 활동하는 상인인 사상(私商)층의 활동도 활발해졌다. 특히 조선후기 평안도에는 청과의 대외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평양·의주·안주의 상인들이 상당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평안도는 지역 특성상 광산 채굴업과 금속가공업도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이 시기에 농업이나 상업을 통해 새롭게 부를 획득한 평안도의 부민(富民)층은 그들의 자유로운 정치·경제 활동을 억제하는 기존의 질서와 국가의 지나친 수탈에 대한 불만이 컸다. 또 이곳의 농토를 잃고 광산이나 수공업장에서 일하게 된 임금 노동자들도 기존 질서에 대해 부민층 못지않은 불만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중앙정부의 서북민에 대한 지역 차별은 양 계층에게 공통의 피해의식을 심어주었다. 홍경래의 난은 이러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10여 년간 준비된 조직적 봉기였다.

발단

봉기를 주도한 홍경래는 몰락 양반 출신으로 1798년(정조 22) 사마시(司馬試)에 낙방한 뒤 풍수꾼으로 각지를 전전하며 일반 백성들의 비참한 현실을 목도하면서 모순된 사회 현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토호인 우군칙, 역노(驛奴) 출신으로 금광 채굴과 대청(對淸)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이희저(李禧箸), 곽산의 진사 김창시(金昌始) 등과 뜻을 모아 봉기를 모의하였다. 아울러, 몰락 양반·사상(私商)·토호·이속(吏屬)·역사(力士) 등도 포섭하여 봉기에 합류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봉기 3~4년 전부터 이희저가 살던 가산군 다복동(多福洞)에 근거지를 두고 광산 노동자를 모집한다는 구실로 유민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키고 역사들로 하여금 지휘관을 맡도록 하여 봉기군을 조직하였다. 또 상인이나 광산주를 동원하여 병기·군복·군량 등을 조달하였고, 평양과 한성의 중인·서얼 등을 포섭하여 봉기가 일어나면 내응하도록 하였다.

1811년(순조 11) 12월 18일, 이해에 찾아온 극심한 흉년으로 일대의 민심이 흉흉해진 틈을 타 홍경래는 평서대원수(平西大元帥)라 자칭하고 농민 봉기를 일으켰다. 다복동에서 거병한 봉기군은 1,000여 명에 달했는데, 남·북의 두 부대로 나누어 진격하였다. 각지에 심어둔 내통 세력의 도움으로 봉기 후 10일도 채 지나지 않아 홍경래가 지휘한 남진군이 가산·정주·박천을 점령하였고, 부원수 김사용(金士用)이 지휘한 북진군이 곽산·선천·태천·철산·용천을 점령하였다. 이로써 청천강 이북의 대부분 지역이 봉기군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급보를 접한 조정은 양서순무영(兩西巡撫營)을 한성에 설치하고 토벌 부대를 파견하였다. 한편, 평안도 병영군을 주축으로 한 지역의 관군도 안주성을 중심으로 집결하였다.

경과

봉기군이 잠시 다복동으로 회군한 사이 관군은 전열을 재정비할 시간을 벌었고, 영변에서는 봉기군과 내통한 세력을 체포하는 데 성공하였다. 청천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던 가운데, 12월 29일 관군의 공격을 받은 남진군이 박천의 송림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여 정주성으로 후퇴하였다. 북진군마저 1812년(순조12) 1월 10일 곽산의 사송야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였다. 이후 다른 거점을 모두 빼앗긴 봉기군은 정주성에서 극심한 물자 부족과 식량난 속에서도 관군에 의해 포위당한 채 끈질기게 저항하였다. 그러나 4월 19일 관군의 화약 매설과 폭발로 인해 정주성의 북쪽 성벽이 무너지자 4개월간에 걸친 봉기군의 농성도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정주성 함락으로 농민 봉기는 진압되었고, 홍경래는 총상을 입고 사망하였다. 이때 생포된 남녀 2,983명 가운데 여자는 842명이고 10세 이하 남자는 224명이었는데 모두 방면되었다. 나머지 남자 장정 1,917명은 관군의 진 앞에서 전부 효수되었다. 생포된 우군칙, 홍총각(洪總角) 등의 반란 주모자는 의금부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은 뒤 모반대역의 죄목으로 참수되었다(『순조실록』 12년 5월 5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서정일기(西征日記)』
  • 『진중일기(陣中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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