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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05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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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을유감계 |
한글표제 | 을유감계 |
한자표제 | 乙酉勘界 |
상위어 | 감계(勘界) |
동의어 | 을유감계회담(乙酉勘界會談) |
관련어 | 간도(間島), 강역(疆域), 국경(國境), 도문강(圖們江),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 석을수(石乙水), 쇄환(刷還), 월경인(越境人), 정해감계회담(丁亥勘界會談), 정해회담(丁亥會談), 토문감계(土門勘界), 화룡골(花龍峪), 토문강(土們江), 홍단수(紅丹水), 홍토수(紅土水) |
분야 | 정치/외교 |
유형 | 사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왕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정욱재 |
발생시기 | 1885년(고종 22) 10월 |
발생장소 | 화룡골(花龍峪) |
관련 인물/집단 | 이중하(李重夏), 조창식(趙昌植), 진영(秦煐), 덕옥(德玉), 가원계(賈元桂)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을유감계(乙酉勘界) |
1885년(고종 22) 조선과 청국이 백두산정계비의 양국 변경 영역의 한계와 국경선 획정을 위하여 진행한 국경회담.
개설
19세기 말 함경도의 자연재해와 관리들의 가렴주구를 피하여 두만강 이북 간도로 이주하는 조선 사람들이 매년 증가하였다. 청국 지방정부에서는 조선 사람들의 귀환을 종용하였지만, 조선 사람들이 잘 따르지 않았다. 이에 청국 지방정부는 강제로 조선 사람들을 청국 사람으로 동화시키려 하자 조선 사람들이 간도가 조선 영토라고 주장하였고, 조선 정부가 청국에 국경회담을 요청하여 이 회담이 시작하였다.
역사적 배경
1712년(숙종 38) 청국과의 회담으로 세워진 백두산정계비는 국경과 영토에 대한 의식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백두산정계비의 설립 이후 백두산과 두만강 일원에는 지속적으로 인구가 유입되어 토지를 개간하고 산림 부산물을 채취하는 경제 활동이 증가되었다. 특히 1869년(고종 6)과 1870년(고종 7)에는 함경도에 큰 흉년이 들면서 많은 사람들이 간도로 이주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들의 쇄환(刷還)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생활 근거를 잡은 주민들이 이에 응하지 않았고, 오히려 간도 이주민은 날로 늘어갔다. 따라서 시간이 흐를수록 간도의 미개간지는 농경지로 바뀌었으며 조선인의 정착촌과 청국인과의 마찰도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발단
1885년(고종 22) 4월에 청나라의 혼춘 당국이 함경도안무사(咸慶道按撫使)조병직(趙秉稷)에게 월경 조선 경작자들을 무력으로 축출할 것임을 통고하고 일부 지방에서 주민을 강제로 추방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대하여 토문감계(土門勘界)를 다시금 요청하였으며, 청나라가 이에 응하면서 양국 간에 감계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양국 간에 간도 문제는 처음에는 월경인을 처리하는 현지 관료들의 행정적 문제에서 정치적 문제로 비화되었다가 결국 양국의 강계(疆界)를 조사하는 외교 문제로 발전하였다. 조선과 청국의 국경 문제 외교회담은 을유년인 1885년(고종 22, 광서 11) 1차 감계회담(勘界會談)이 진행되었는데, 일명 ‘을유감계회담(乙酉勘界會談)’이라고 한다.
경과
조선 정부는 청국에서 국경 문제 때문에 관원을 파견한다는 연락을 받고 조선에서 먼저 관원을 보내어 맞이해야 한다는 접빈객의 의례에 맞추어 안변부사(安邊府使)이중하(李重夏)를 토문감계사(土們勘界使)로 임명하고, 교섭아문(交涉衙門) 주사(主事)조창식(趙昌植)을 토문감계종사관(土們勘界從事官)으로 임명하여 청국 관원을 맞이하게 하였다. 청국에서는 감계회담에 독리상무위원(督理商務委員)진영(秦煐), 혼춘(琿春)에서 간파(揀派)된 승판처(承辦處)덕옥(德玉), 변황사(邊荒事)가원계(賈元桂)가 대표 위원이었다.
1차 을유감계회담은 9월 30일과 10월 1일에 회령부의 공당(公堂)에서 열렸다. 이중하는 감계를 위하여 먼저 숙종대 백두산정계비를 세우면서 작성한 문건을 길림장군(吉林將軍)의 관서 내에서 확인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청국 측에서는 시간이 지나 문서가 유실되어 없다면서 백두산정계비에 관한 것을 조사하기보다는 도문강변계(圖們江邊界)를 감정(勘定)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이중하는 조선 백성들이 월경한 것은 거듭된 흉년 때문이며 그들은 황은에 힘입어 살려고 노력하는 자들인데 혼춘에서 병사를 이끌고 와서 불사르고 쫓아내니 참담한 일이라면서 백두산 분수령(分水嶺) 위의 비석은 강희제가 조선과 청국을 획정(劃定)한 것으로 월경인들이 경작한 곳이 조선 땅임을 입증한다고 하여 비석의 감정을 주장하였다. 그러자 청 측은 비석에서 말하는 토문강과 두만강이 실제는 동일한 것이므로, 비석보다는 물길을 조사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이중하는 두만(豆滿)이라는 말은 우리나라의 방언이며 토문과는 별개의 강이라고 하였고 백두산정계비에 “동쪽은 토문이 된다.”라고 하였으니 동변수원(東邊水源)을 따라서 내려가면 이어서 토벽(土壁)이 문과 같은 곳이 있어서 조선인들이 토문강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하였다. 특히 이중하는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에서 천자에게 올린 문서에 도문강(圖們江)이 조선과 길림의 경계가 된다고 실려 있고 「흠정황조통전방문(欽定皇朝通典防門)」 과 「흠정황조사예고(欽定皇朝四裔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고 하면서 청국의 자료를 근거로 제시하기도 하였다.
조선과 청국은 양측의 주장을 반복하면서 별다른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10월 3일 무산으로 이동하고 10월 6일 2차 회담을 열게 되었다. 그러나 이 회담에서도 이중하는 백두산정계비의 답사를 요구하였고, 청국 측 역시 도문강의 근원이 두만강인 것을 확인하자는 주장만을 되풀이하였다. 실제로 감계회담 이전에 청국 감계위원들은 회령으로부터 강변 수백 리의 그림들을 그려 와서 오로지 두만강의 원류만을 조사하고자 하였다. 이중하는 청국 측에서 백두산정계비의 위조 및 그 내용을 의심하는 것을 강희제의 유지를 모욕하는 것이라고 비난하였으며, 또한 정계비에 나오는 강물의 근원을 먼저 조사한다면 눈이 내리고 추운 계절에 백두산에 올라 정계비를 조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청측의 논리를 지적하였다. 청국은 더이상 이중하의 논리에 반론을 제기하기가 궁색해져 10월 6일 백두산 등반에 오르게 되었다.
이때 청국 측에서는 재차 비석의 진위를 의심하며 두만강으로 합쳐지는 세 강의 조사를 주장하였다. 양국은 3일 동안 논쟁하다가 각자 인원을 내어 세 길로 나누어 조사하기로 약정하였다. 소모적인 회담은 11월 말 끝나게 되었으며 청국의 감계파원(勘界派員)진영(秦煐) 이하 일행은 화룡골(和龍峪)로 떠났다. 덕옥(德玉)과 가원계(賈元桂) 이하 일행은 혼춘으로 각각 떠나서 사실상 양국 간의 감계회담은 막을 내렸다. 이중하는 감계회담을 마친 후 청국에서 파견한 일행의 행적을 항목별로 나누어 기록한 책을 2건 만들어 보고하였다. 그리고 이미 작성하였던 간도 경작민의 분포를 조사해서 만든 책을 4개 더 만들어 보고하였다. 또한 이중하는 자신의 견해를 정리한 문건과 함께 비문 1본, 도회(圖繪) 1본, 조회등초(照會謄抄) 1권, 담초(談草) 1권 등을 승정원에 올려 왕에게 보고하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감계사등록(勘界使謄錄)』
- 『통감부문서(統監府文書)』
- 『통감부임시간도파출소기요(統監府臨時間島派出所紀要)』
- 이왕무·양승률·서동일·정욱재, 『역주 감계사등록』 1, 동북아역사재단, 2008.
- 이왕무·양승률·서동일·정욱재, 『역주 감계사등록』 2, 동북아역사재단, 2010.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