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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명만력제 시기 발배(哱拜)가 주도하여 발생한 대규모 반란 사건.

개설

영하지역(寧夏之役)은 임진왜란·양응룡(楊應龍)의 난과 함께 만력삼대정(萬曆三大征)이라 불린다. 발배(哱拜, [보바이])와 발승은(哱承恩) 부자는 유동양(劉東暘)·허조(許朝)·토문수(土文秀) 등의 세력과 결탁하여 영하 일대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반란군은 나라에서 군사들을 돌보지 않고, 외적을 제어하는 방책이 잘못되어 군량이 부족해졌다는 점을 명분으로 내세워 군사를 일으켰다.

당시 반란군은 옥천영(玉泉營)·중위(中衛)·광무(廣武)·하(河) 등의 영하위에 소속된 여러 부를 함락하면서 위세를 떨쳤다. 만력제는 위학증(魏學曾)에게 상방검(尙方劍)을 하사하고 반란군을 토벌하도록 지시했다.

위학증은 반란군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고 적을 회유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반란군을 무력으로 제압하지 않고, 반란군을 포섭하려는 회유책은 조정 신료들의 반발을 야기했다. 또한 여러 전투를 통해 관군의 피해가 컸는데도 이를 조정에 제대로 보고하지 않은 것도 문제가 되었다. 결국 만력제는 위학증을 체포해서 북경으로 압송하도록 지시했다.

조정에서는 다시 섭몽웅(葉夢熊)과 이여송(李如松)을 파견해서 반란군을 진압하도록 조치했다. 당시 이여송은 수공(水攻)을 통해 반란군에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이여송 등의 활약으로 위학증이 북경으로 압송된 이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발배의 반란은 평정되었다. 이여송은 곧바로 조선으로 파견되어 일본군과의 전투에 임했다.

경과

조선에 파견되었던 명의 참장(參將)낙상지(駱尙志)는 공조 판서한응인(韓應寅)에게 영하 지역의 반란군[靈夏之賊]이 평정되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아울러 영하 지역의 반란이 평정되었기 때문에 명군이 보다 신속하게 조선으로 오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선조실록』 25년 10월 6일).

다음 해 2월 명에서는 요동진무(遼東鎭撫)계연방(桂聯芳)을 조선에 파견해서 영하 지역의 반란을 평정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는 등황조서(謄黃詔書), 즉 황색 종이에 베껴 쓴 조서를 반포했다. 조서에는 발배와 발승은 부자가 유동양·허조·토문수 등의 세력과 결탁하여 영하 일대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또한 반란군은 나라에서 병사들을 돌보지 않고, 외적을 제어하는 방법을 잘못하여 군량이 부족해지게 되었다는 점을 명분으로 내세웠다는 점도 기록되어 있었다. 아울러 반란군이 참람하게 왕호(王號)를 칭하였으며, 거짓 격서(檄書)를 보내 칙서(勅書)를 헐뜯고, 창고를 약탈하고, 죄수를 함부로 풀어주는 등의 포악한 짓을 저질렀다는 내용도 수록되어 있었다(『선조실록』 26년 2월 4일).

이에 조선에서는 영하의 평정을 하례하는 표문(表文)과 평양(平壤)을 수복한 일에 대한 주본(秦本), 즉 중국 황제에게 올리는 글을 마련했다. 그리고 이조 판서한준(韓準)을 사신으로 임명해서 표문과 주본을 명에 가져가도록 지시했다(『선조실록』 26년 2월 10일).

참고문헌

  • 『만력삼대정고(萬曆三大征考)』
  • 『명사(明史)』
  • 『명실록(明實錄)』
  • 久芳崇, 「16世紀末, 日本式鐵砲の明朝への傳播-萬曆朝鮮の役から播州楊應龍の亂へ」, 『東洋學報』84-1,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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