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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05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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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웅치지전 |
한글표제 | 웅치지전 |
한자표제 | 熊峙之戰 |
동의어 | 웅치(熊峙) 전투, 곰티재 전투 |
관련어 | 이치지승(梨峙之勝), 이치(梨峙) 전투, 임진왜란(壬辰倭亂) |
분야 | 정치/군사·국방/전쟁 |
유형 | 사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방기철 |
발생시기 | 1592년(선조 25) 7월 |
발생장소 | 전라북도 전주 외곽 |
관련 인물/집단 | 소조천륭경(小早川隆景), 이복남(李福男), 정담(鄭湛), 황박(黃璞), 안국사혜경(安國寺惠瓊)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웅치지전(熊峙之戰)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선조수정실록』 25년 7월 1일, 『선조실록』 25년 9월 12일 |
1592년 7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관군이 전주성으로 향하는 일본군과 웅치에서 싸운 전투.
개설
웅치 전투는 호남 지역으로 진출하려는 일본군에 맞서 조선의 관군과 의병이 힘을 합쳐 전주 외곽인 웅치(곰티재)에서 벌인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 장수 4명 및 수백여 명의 군사가 전사했다. 웅치 전투와 이어 벌어진 전라도 이치(梨峙)와 충청도 금산(錦山)에서의 전투에서 조선군은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결과 일본군의 전라도 지역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역사적 배경
일본에서는 전쟁에서 패한 장수는 스스로 자결하거나 용서받아 승리한 무장의 부하가 되었다. 따라서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도성 점령과 조선의 왕 선조를 사로잡는 데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선조가 의주로 피하고 명군이 참전하면서 전쟁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였다. 그러자 일본군은 곡창지대를 확보하기 위해 도성에 머물던 군사 일부를 전라도 지역으로 파견하였다.
발단
1592년(선조 25) 6월 소조천륭경(小早川隆景)이 거느린 일본군은 무주와 금산 방면으로 진격하며 전라도 지역으로의 진출을 꾀하였다. 전라감사(全羅監司)이광(李洸)은 이계정(李繼鄭)에게 육십령(六十嶺), 곽영(郭嶸)에게 금산, 이유의(李由義)에게 팔량치(八良峙), 장의현(張義賢)에게 부항령(富項嶺) 등을 방어토록 하여 일본군의 전라도 지역으로의 진출을 막도록 하였다.
6월 19일 안국사(安國寺) 혜경(惠瓊)이 거느린 일본군이 부항령을 지나 무주, 23일에는 소조천륭경이 거느린 일본군이 금산에 진입하였다. 이로써 호남 지역은 일본군의 직접적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일본군에 맞서 곽영은 진산(珍山)으로 옮겨 소조천륭경 군의 전주 진출을 저지하려 했고, 이유의가 거느린 군사는 송현(松峴)으로 옮겨 혜경이 거느린 일본군이 남원으로 향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7월 5일 일본군이 웅치로 향하자 이광은 남원에 주둔 중이던 황진(黃進)으로 하여금 웅치를 방어케 하였다. 하지만 황진이 웅치로 돌아오기 전 일본군은 웅치에 있는 조선군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펼쳤다.
경과
1592년 7월 8일 일본군이 웅치를 공격해 왔다. 당시 웅치는 김제군수(金堤郡守)정담(鄭湛), 나주판관이복남(李福男), 의병장 황박(黃璞) 등이 지키고 있었다. 1선에서 적을 막던 황박이 밀리자, 2선의 이복남이 나섰다. 하지만 2선마저 무너지면서 정담이 지키고 있던 웅치 정상까지 일본군이 이르렀다. 정담은 화살이 떨어질 때까지 싸운 후 백병전을 펼치다 전사했다. 정담뿐 아니라 부하장수 강운(姜運)·박형길(朴亨吉) 등과 수백 명의 조선군이 전사했고, 이복남과 황박은 안덕원(安德院)까지 물러났다.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조선군의 시체를 모아 무덤을 만들고 그 위에 ‘조선의 충간의담을 조위한다[吊朝鮮國忠肝義膽].’라고 썼다(『선조수정실록』 25년 7월 1일). 이러한 기록은 조선군의 용맹함에 일본군이 감탄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웅치 전투에서 조선군이 얼마나 치열하게 일본군과 맞서 싸웠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웅치 전투는 조선군이 패한 전투였지만, 일본군 200여 명을 사살하였다(『선조실록』 25년 9월 12일). 실제로 일본군은 웅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조선군의 강한 저항으로 전력에 많은 손실을 입었다. 때문에 전주성을 눈앞에 두고도 공격하지 못하고 안덕원 너머에 주둔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점에서 웅치 전투는 이치 전투와 함께 일본군의 전라도 지역 진출을 저지한 중요한 전투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 『난중잡록(亂中雜錄)』
- 『쇄미록(瑣尾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류재성, 『한민족전쟁사』Ⅲ, 국방부군사연구소, 1996.
- 온창일, 『한민족전쟁사』, 집문당, 2008.
- 이형석, 『임진전란사』上, 신현실사, 1977.
- 하태규, 「임란에 있어 웅치전의 위상에 대하여-호남방어와 관련하여-」, 『전라문화논총』4, 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0.
- 하태규, 「임진왜란 초 호남지방의 실정과 관군의 동원실태」, 『지방사와 지방문화』16권 2호, 역사문화학회, 2013.
- 하태규, 「임진왜란 초기 전라도 관군의 동향과 호남방어」, 『한일관계사연구』26, 한일관계사학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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