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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04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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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임오화변 |
한글표제 | 임오화변 |
한자표제 | 壬午禍變 |
분야 | 정치/정치운영/정쟁·정론 |
유형 | 사건 |
집필자 | 최성환 |
발생시기 | 1762년(영조 38)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임오화변(壬午禍變)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정조실록』 13년 10월 7일, 『영조실록』 37년 1월 5일, 『고종실록』 36년 11월 19일, 『영조실록』 37년 5월 8일, 『영조실록』 38년 윤5월 13일, 『영조실록』 38년 윤5월 21일, 『영조실록』 38년 7월 24일 |
임오년인 1762년(영조 38) 윤5월 영조가 대리청정 중인 왕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굶어 죽게 한 사건.
개설
임오화변은 대리청정 중인 왕세자를 비상한 방식으로 폐위한 사건이어서 당대에는 물론 오늘날까지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 사건을 보는 시각에 따라 영조대부터 순조대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정치적 쟁점이 판가름 나는 핵심 사안이기도 하다.
역사적 배경
임오화변은 영조와 세도세자의 성격적 갈등, 신임의리를 둘러싼 노론·소론 당론의 대결 구도, 세자를 둘러싸고 궁중 세력과 연계된 당파 간 갈등 등 다양한 원인을 배경으로 한다. 특히 경종대 이후 당쟁이 군주 혹은 예비 군주를 선택하는 상황과 결부될 때 전개되는 복잡한 양상을 전형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이다.
발단
임오화변이 발생한 원인에 대해서는 노론·소론 당쟁설과 영조와 사도세자의 성격 갈등설이 대립하는 가운데 뚜렷한 설명이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 사도세자의 비(妃)인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역시 양 극단의 설명을 오가고 있기 때문에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무덤인 현륭원(顯隆園)의 「지문(誌文)」을 지어 임오화변을 종합적으로 설명하였다(『정조실록』 13년 10월 7일). 하지만 「지문」은 사도세자를 위한 사사로운 정(情)의 처지에서 서술되었다는 선입견 때문에 객관적 설명으로 인정받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지문」은 정조대까지 대립하고 있던 설을 정조의 시각에서 종합한 것으로 결코 어느 일방에 치우친 저작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지문」의 시각에 따라 임오화변을 정리하고자 한다.
사도세자가 어린 시절에 총명하고 영조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나 세자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정으로 인해 영조와 생모 영빈이씨(暎嬪李氏)의 따뜻한 훈육을 받지 못하여 부자간의 정이 도탑지 못하였던 것은 여러 문제를 낳았다. 게다가 대리청정을 맡은 이후 세자는 신임의리의 완전한 실현 문제와 관련하여 영조의 기대에 충실하게 부응하지 못했다. 이 틈을 타서, 문녀(文女), 즉 숙의문씨(淑儀文氏)와 그 오라비 문성국(文聖國) 등 궁중 세력과 김상로(金尙魯)·홍계희(洪啓禧) 등 일부 노론 세력이 연합하여 세자의 지위를 흔들고자 각종 무함을 주도하였다. 여기에 일부 소론 탕평당도 호응하여 갈등 국면을 조성하는 등 세자의 지위가 점차 흔들리게 되었다.
게다가 1757년(영조 33)에 왕실 내에서 세자를 매우 아꼈던 세자의 할머니 인원왕후(仁元王后)와 법모(法母)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연이어 사망했다. 세자는 이들의 상을 치르느라 건강을 잃었을 뿐 아니라 왕실의 보호막이 사라짐에 따라 정치적으로도 매우 곤란에 빠졌다. 이 무렵 우물에 투신자살하는 소동을 벌인다든가 정신병 증세에 따라 심각한 과실을 저지르는 등 세자로서 자질 면에서 심각한 결격 사유를 노출하기 시작하였다. 이후로는 궁중 내 무함 세력의 술책으로 인하여 세자가 영조를 알현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는 등 부자간은 더욱 소원해졌고, 그 틈을 타 각종 무함이 난무하는 등 사태는 점점 악화되었다. 세자도 이제는 난국을 타개하기에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너무 많았고, 노론·소론 일부 대신들의 보호 노력만으로는 사태를 방어하기에도 벅찬 상황이었다.
경과
1761년(영조 37)에는 이천보(李天輔)·민백상(閔百祥)·이후 등 세자를 보호하던 주요 대신마저 연이어 사망하였다(『영조실록』 37년 1월 5일) (『고종실록』 36년 11월 19일). 세자는 평양까지 미행(微行)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중대 과실을 범하는 등 사태는 총체적 난국으로 치달았다(『영조실록』 37년 5월 8일). 영조는 이 모든 상황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결단의 방식을 궁리하였던 듯하다. 게다가 이제는 세자의 아들인 세손이 장성해 있었고, 1762년에는 혼례까지 무사히 마친 상태였다. 이해 5월에는 홍계희의 겸종(傔從) 출신인 나경언(羅景彦)이 세자의 비행을 고발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하여 세자의 생모인 영빈이씨(暎嬪李氏)가 세자의 심각한 병증과 예측 불가능한 변란 위험을 실토하였고, 영조는 결국 윤5월에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화변(禍變)의 방식으로 세자를 폐위하였다(『영조실록』 38년 윤5월 13일). 그 후에 영조는 세자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고 장례를 직접 주관한 후 그 아들인 세손에게 동궁(東宮)의 지위를 계승하도록 하였다(『영조실록』 38년 윤5월 21일) (『영조실록』 38년 7월 24일).
참고문헌
- 김성윤, 『조선 후기 탕평 정치 연구』, 지식산업사, 1997.
- 정병설, 『권력과 인간』, 문학동네, 2012.
- 박광용, 「조선 후기 「탕평」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 최성환, 「정조대 탕평 정국의 군신 의리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 김성윤, 「영조대 중반의 정국과 ‘임오화변’: 임오화변(사도세자 폐사 사건)의 발생 원인에 대한 재검토를 중심으로」, 『역사와 경계』43,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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