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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59 기준 최신판



조선초기 국가에서 필요한 철을 생산하기 위하여 동원된 일반 양인.

개설

조선건국 이후 체제가 안정되면서 특수한 물자를 생산하기 위하여 일반 민호나 군사를 동원하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건국 이래 호적과 군적이 어느 정도 정비되어 국역 부담자가 증가한 반면에, 국내외 정세는 안정된 데 따른 것이었다. 이에 국역 대상이나 특별하게 부여할 일이 없는 노동력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일반민이나 군사들을 임시로 공사에 동원하는 경우도 많았으며, 정역호와 같이 의무를 명시해서 ‘모모군’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 중에서 철을 생산하여 공물로 바치는 역을 담당하였던 이들을 취련군이라고 하였다.

이 당시의 군은 단순히 상습적으로 어떤 일에 종사하는 자에게 붙이던 ‘꾼’과는 동의미가 달랐다. ‘군’은 양인으로 차정되는 것이 원칙이었고, 따라서 그 역은 양역의 일종으로 간주되었다.

담당직무

취련군은 조선시대 철을 생산하여 공물로 바치는 역을 담당하였다. 취련군은 철간과 달리 양인 신분으로 국가의 역에 동원되어 철장(鐵場)에서 철을 생산하였다.

변천

고려말까지 국가는 철의 생산에 전혀 관여하지 않고, 각 고을에서 일정량의 철을 거두는 것으로 국가에서 필요한 철의 수요를 충당하였다. 1391년(공양왕 3) 이후에는 군역 대신 철을 생산하여 납부하는 역을 부담하는 철간(鐵干)을 지정하여 철을 공급받았다. 이들 철간에게는 그 반대급부로 구분전(口分田)을 지급하고 잡역을 면제해 주었다. 그 대신 철을 생산해서 공물로 바치는 모든 과정은 철간의 책임이었다.

이와 함께 일반민, 즉 취련군을 동원하여 철을 생산하는 철장(鐵場)도 운영하였다. 조선조에 들어 철장 운영이 확대되면서 태종 말이나 세종 초에는 각 고을마다 철을 거두는 제도를 폐지하였다. 1430년(세종 12)에는 철간을 혁파하고 군역에 충당함으로써 철간이 사라졌다. 그 결과 철간이 지던 부담은 철장에 동원되는 취련군의 부담으로 전가되었다. 취련군은 철의 생산에서 철간이 하던 일을 일반 민호(民戶)의 부담으로 전가시키는 과정에서 나타난 존재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 유승원, 『조선초기신분제연구』, 을유문화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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