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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59 기준 최신판



명·청 시기 전시에 동원되는 비상설 관직으로 변경 방어를 담당하던 무관직.

개설

전시에 중앙에서 파견되는 비상설 관직이었으나 명초부터 끊이지 않는 전쟁으로 군무를 총괄하는 고정된 관직으로 점차 변하였고 진수(鎭守)라고도 하였다. 통상 전쟁이 발생하면 공(公), 후(侯), 백(伯), 도독(都督)을 천거하여 담당하게 하였다. 장군인(將軍印)을 수여받은 자는 괘인장군(挂印將軍)이라고 하였다. 황제의 직접 지휘를 받았으며 품계와 정원이 없었고 맡은 권한이 매우 컸다. 명나라 중엽 이후에 날로 설치가 증가하여 점차 유관(流官)이 담당하였으며 총독(總督), 순무(巡撫)의 규제를 받았다.

청나라 때에는 군권이 각 성의 순무, 제독에 귀속되었고 순무, 제독을 따르는 총병관은 곧 정2품이 되어 주둔지를 관리하는 등의 사무를 담당하였으나, 통할하는 군사의 수는 수백 명에서 1만 5천 명까지 차이가 매우 컸다. 명조 말기에는 전국적으로 총병의 수가 20여 명이었으나 청조에 이르러서는 80여 명으로 이들이 약 63만 병력을 통할하였다.

담당 직무

전시에 변방과 지방을 진수(鎭守)하는 군사 장관으로 군사의 편제, 통솔 등 군무를 총괄하였다. 임진왜란 시기 총병은 부총병, 참장, 유격 등과 같이 조선에 파견되어 전투를 지휘하였다(『선조실록』 26년 1월 11일) (『선조실록』 31년 3월 29일). 총병 아래에는 부총병이 있었다. 부총병양원(楊元)의 경우 정유재란이 발발하기 직전 조선에 파견되어 명군뿐만 아니라 조선의 여러 장수들도 지휘하는 등 군무를 총괄 집행하기도 했다(『선조실록』 30년 5월 9일).

변천

명대 총병은 1369년(명 홍무 2) 10월 처음 설치되었다. 이후 1371년(명 홍무 4), 1374년(명 홍무 7), 1387년(명 홍무 20)에도 총병을 임명하였다. 1400년(명 건문 2) 이경륭(李景隆)을 평연장군(平燕將軍)으로 삼고 총병관을 맡도록 하였다. 영락제가 즉위하고 하복(何福)에게 정로장군인(征虜將軍印)을 수여하고 총병관으로 삼았다. 1425년(명 홍희 1) 2월 비로소 장군인을 제 변장에게 수여하였는데, 그중 총병이 4명, 참장은 4명이 있었다. 그러나 계진(薊鎭)을 진수하는 총병은 장군으로 칭할 수 없었다.

명조 시기 총병은 품급이 없는 무관직이었다. 총병은 군사의 편제, 통솔 등 군무를 통괄하였는데 통상 공후 혹은 지방 도독이 겸임하였다. 청초에도 총병은 품계가 정해지지 않았으나 1735년(청 건륭 18) 비로소 품계가 정해졌다. 청대 총병은 녹영병정(綠營兵正)으로 정2품이었으며 제독의 관리를 받았고 본진(本鎭)의 군무를 담당하였으며 총진(總鎭)이라 불렀다. 수도 보병영(步兵營)에 좌·우익총병이 있었으며 청말 북양해군에도 좌·우익총병이 있었다.

참고문헌

  • 남의현, 『明代遼東支配政策硏究』, 강원대학교출판부, 2008.
  • 沈起煒·徐光烈, 『中國歷代職官辭典』, 上海辭書出版社, 1998.
  • 中國歷史大辭典·明史編纂委員會編, 『中國歷史大辭典·明史卷』, 上海辭書出版社,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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