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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58 기준 최신판



조선전기에 화약장(火藥匠)들로 조직한 군대.

개설

고려시대 말기에 최무선(崔茂宣)이 중심이 되어 화약과 화약 무기를 개발하기 시작한 이래, 화약 무기는 여진족이나 왜구 등 외적의 침입을 격퇴할 때 매우 중요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화약 무기는 주로 적을 놀라게 하는 정도의 용도로 사용하였을 뿐, 부대에 편제하여 적극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에 따라 화약 무기에 대한 국정 책임자들의 관심이 줄어든 15세기 후반부터 화약장들에 대한 처우가 악화되었고, 화약 무기의 발달도 침체를 면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화약장들의 청원을 수용하여 편성한 특수부대가 파진군(破陣軍)이었다.

설치와 목적

화포와 화약을 다루는 장인(匠人)을 화약장 또는 약장(藥匠)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성능이 좋은 화약을 개발하고 제조하는 데 종사하였다. 세종 때는 4군과 6진의 개척이 본궤도에 오름에 따라 평안도와 함경도의 국경 지역 요새에 파견되어, 화포군(火砲軍)이라는 이름으로 총통과 화포를 사용하여 전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국가에서는 이들에게 봉족(奉足) 2명씩을 배정해주었으며, 양인이면 6품 거관(去官), 천인이면 장원서(掌苑署)에 속하게 하는 등의 대우를 해주었다.

그러나 15세기 말 이후 이러한 대우 규정은 폐지되었지만 이들에 대한 통제는 여전히 유지되자, 1477년(성종 8) 화약장들이 장계(狀啓)를 올려 화약 제조 기술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자신들에 대한 처우를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들은 자신들이 “일상 용품을 만드는 장인이 아니므로 다른 생업에 종사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데, 국가가 서울에 가두어놓고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게 한다. 젊은 후배들이 이를 비웃으며 화약장이 되기를 거부하고 있으므로, 앞으로 화약장이 소멸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성종실록』 8년 1월 29일). 이에 정부는 화약장 지원자가 줄어드는 현실을 고려하여 화약장들에게 파진군이라는 이름을 부여하였다. 파진군이란 명칭은 당시 화포의 기능을 ‘임적파진(臨敵破陣)’, ‘임진제적(臨陣制敵)’이란 용어로 표현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구성과 직무

파진군은 대부분 천인으로 구성되었으며, 총인원은 180명으로 30명씩 6교대로 근무하였다. 이들의 중심 임무는 화약의 개발과 제조였으며, 독립된 전투부대가 아니어서 실제로 외적이 침입하였을 때 출정하는 파진군의 수는 1∼2명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파진군에게는 1보(保) 즉 봉족 2명이 배정되었고, 체아직도 지급되었다. 체아직으로는 잡직체아를 지급했는데, 종7품 근사(勤事) 2과(窠), 종8품 종사(從事) 2과, 종9품 추사(趨事) 3과 등 총 7개의 자리를 배당하였다. 이들은 909일을 근무하면 품계를 올려주었는데, 정6품이 한계였다. 이들의 임무 수행 방식이 이전과 다르지 않아, 일상에서는 여전히 약장이라는 명칭을 계속 사용하였다.

변천

파진군에 대한 기록은 1606년(선조 39) 이후에는 『조선왕조실록』에 보이지 않는다. 새로 조총을 중심 무기로 사용하는 훈련도감(訓鍊都監)이 설치되어 기구가 확대되고, 다른 중앙 군영 또한 속속 설치되는 상황에서 파진군은 점차 새로운 중앙 군영에 흡수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임진왜란 이후의 기록인 『신기비결(神器秘訣)』이나 『화기도감의궤』, 19세기에 편찬된 『거관대요(居官大要)』 등에서 여전히 파진군의 명칭이 등장하는데, 이는 파진군의 실체가 존재했다기보다는 화약장들이 자신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 듯하다.

참고문헌

  • 허선도, 『조선시대화약병기사연구』, 일조각,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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