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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58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 유생의 교육을 담당하던 성균관의 종3품 관직.

개설

성균관 소속의 종3품 관직으로, 1401년(태종 1) 설치 당시 정원은 2명이었다가 조선후기에 1명으로 줄었다. 사성(司成)은 성균관 소속 유생들의 교육을 주관하던 직책이었으나 그 외에 종학(宗學) 등의 관직을 겸하거나 각종 다른 업무에 차출되기도 하였다. 고종 연간에 성균관 제도가 개편되면서 소멸된 것으로 추정된다.

담당 직무

사성은 성균관 소속의 전임 관직으로, 성균관에서 대사성을 보좌하여 유생들의 교육을 주관하였다. 사성은 이 밖에도 원자(元子)나 세자의 성균관 입학례 때 박사(博士)로 차출되어 제자가 스승에 예물을 올리는 속수(束脩)의 예를 주관하거나(『태종실록』 3년 4월 8일), 경차관으로 지방에 파견되어 민원을 파악하기도 하였다(『태종실록』 13년 12월 21일). 또한 1430년(세종 12) 3월에 종친의 교육을 위해 종학을 설치하면서 성균관 관원으로 박사를 겸해 종학의 교육을 담당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12년 3월 6일).

변천

사성은 고려말 성균관에 소속된 관직이었는데, 조선 건국 직후인 1392년(태조 1) 7월 관제 반포 당시에 좨주로 개칭되어 설치되었다. 좨주는 종3품으로 정원은 1명이었다. 이후 1401년(태종 1) 7월 13일 관제 개편 때 좨주가 다시 사성으로 개칭되었다(『태종실록』 1년 7월 13일). 『경국대전』에서는 정원이 2명이었으나, 조선후기 영조대 간행된 『속대전』에서는 1명이 감축되어 1명으로 규정되었다. 다른 관청 소속 관원 중에 뛰어난 학덕이 있다고 칭해지는 자가 이 직을 겸하여 겸사성(兼司成)으로 유생 교육을 담당하기도 하였다(『단종실록』 2년 8월 28일). 사성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성균관 제도가 개편되면서 소멸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태학지(太學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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