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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58 기준 최신판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여행자들을 위한 숙박 시설인 원의 운영을 담당한 신역인.

개설

원주(院主)는 원(院)을 운영하면서, 공적인 임무로 여행하는 관리뿐 아니라 상인과 여행자들에게 숙식과 편의를 제공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원이 대부분 개인적으로 운영되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서면 국가 차원에서 새롭게 체제가 정비되면서 전국적으로 1,300여 개가 설치되었다. 조선초기에는 사찰을 원으로 바꾸거나 혹은 지방 수령이 승려를 동원해 원을 지은 경우가 많아 원주들 가운데 승려의 비중이 높았다. 그러나 이후 점차 일반 백성들로 전환되었으며, 『경국대전(經國大典)』이 반포되는 성종대에 이르러서는 인근의 양인을 원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담당 직무

원주의 주요 임무는 원을 관리하며 여행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유민(流民)을 통제하는 임무도 맡았는데, 유민을 발견하는 즉시 신고해야 했으며 그러지 않으면 법에 따라 처벌을 받았다. 또한 변란이 일어날 기미가 있으면 관에 고발해야 하는 등 원의 운영을 포함해 잡다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리고 그 업무의 특수성으로 인해 잡색군(雜色軍)으로 편제되어 정식 군역을 면제받았다.

변천

조선초기에는 원을 설치 및 정비하면서 원주 제도에 대해 여러 차례 논의하였다. 특히 세종대에는 지방 수령들이 원주를 제대로 두지 않거나 노역을 많이 시켜서 원 업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는 등 폐단이 계속되자, 승려와 양민 중에서 선량한 자를 원주로 삼아 각종 잡역에서 면제시키고 해당 임무에 충실하게 종사토록 하는 등 적극적으로 원주 제도를 정비하였다(『세종실록』 7년 11월 20일).

원주는 신역(身役)을 부담하였으므로, 국가에서는 이들에 대한 일정한 처우를 마련하였다. 태종대에는 1~2결 이하의 토지를 가진 자에게는 관아의 구종(丘從)·진척(津尺) 등과 마찬가지로 봉족(奉足) 1호(戶)를 지급하였으며, 3~4결 이상을 가진 자에게는 지급하지 않았다(『태종실록』 4년 5월 23일). 문종대에는 원주를 비롯한 여러 신역인(身役人)들은 본가에 3정(丁) 이상이면 다른 역에 차출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문종실록』 1년 1월 25일), 세조대에는 동거하는 친족이 3명 이하이면 다른 역에 차출하지 못하게 하였다(『세조실록』 10년 10월 15일). 또한 『경국대전』에 따르면 대로(大路)에는 5호(戶), 중로(中路)에는 3호, 소로(小路)에는 2호씩 원호(院戶)를 정하여, 이들에게는 잡역을 면제해 주었다.

한성부 성 아래에 있는 원은 5부에서, 지방에 있는 원은 지방 수령이 부근의 백성 중에서 원주를 뽑아 원을 관리하게 하고, 이를 한성부와 관찰사가 자세히 살피게 하였다. 그리고 원주에게는 원위전(院位田)을 지급하여 원의 운영에 필요한 각종 경비를 충당하게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국가의 지원과 통제가 소홀해지면서 유망(流亡)하거나 다른 역으로 이동하는 사람이 늘어나 원주의 수는 점차 줄어들었다. 또 사적으로 운영하는 숙박 시설이 증가함에 따라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서 원은 점차 쇠퇴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한희숙, 「조선초기의 院主」, 『서암조항래교수 화갑기념 한국사학논총』, 아세아문화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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