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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56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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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거장 |
한글표제 | 거장 |
한자표제 | 車匠 |
분야 | 정치/행정/관속 |
유형 | 직역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박종민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거장(車匠)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광해군일기』 13년 6월 17일 |
수레 제작과 보수, 개조 등을 맡던 장인.
개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거장(車匠)은 경공장(京工匠)으로서 선공감(繕工監)에서 10명이 활동하였다. 이들은 제용감(濟用監)으로부터 면포(緜布)와 정포(正布) 등으로 월급을 정기적으로 지급받았다. 『경국대전』은 모든 사(司)와 읍(邑), 역(驛)에 대차(大車)와 편차(便車), 곡차(曲車), 강주(杠輈)를 함께 배치해놓고 물자를 원활하게 수송하도록 명문화하였다. 대차는 소 두 필이 이끄는 수레로 보통 짐수레보다 크다. 편차는 손으로 끄는 작은 수레이다. 곡차는 앞에 작은 바퀴를, 뒤에 큰 바퀴를 달아서 쉽게 방향을 돌릴 수 있는 수레이다. 강주는 중앙의 대(臺) 위에 짐을 얹고 두 사람이 앞뒤에서 메게 되어있으며 주로 귀중품을 운반하였다.
담당 직무
거장은 경공장으로서만 아니라 지역의 다양한 현장에서 활동하였다. 관청은 전국적으로 배치된 거장을 비상시에 신속하게 동원해서 활용하였다. 돌을 나르는 수레가 건설 현장에서 고장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장이 부족해서 적시에 수리하지 못하는 사례가 빈발하는 건축 현장 담당 관리인은 인근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들을 동원하였다. 부족한 거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왕이 나서기도 하였다. 광해군은 거장이 부족해서 수레를 고치지 못하고 있던 건축 현장의 요청을 받고 안서(安西) 지역에서 활동하던 수레 제작 장인 14명을 급히 올려 보내도록 유시를 내려서 부족한 거장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광해군일기』 13년 6월 17일).
거장은 건축 현장뿐만 아니라 국장(國葬)에서도 활약하였다. 정조의 국장에 일방(一房)은 왕의 옥체 운구와 권위의 상징물을 운반하는 용구를 제작하는 임시 관청으로 5명의 거장이 활약하였다. 이들은 왕의 옥체를 직접 운구하는 대여와 견여, 외재궁여, 요여와 채여, 윤여 등을 목수와 소목장과 함께 제작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방(二房)에서는 무려 15명의 거장이 활약하였다. 이들은 방상씨거와 죽산마, 죽안마, 청수안마, 자수안마 등을 목수와 함께 제작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국장 용구를 통해서 왕실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서 당대 최고 수준으로 제작해야 하므로, 도감은 뛰어난 기술력을 지닌 장인들을 활용했다.
변천
조선시대 초까지 국장에서 국장도감은 유거(柳車)를 사용해서 왕의 옥체를 운구하였다. 유거는 국장 때에 상여를 메는 군사인 담배군들이 궁궐 밖에서 영악전까지 재궁을 싣고 운구한 수레이다. 당시 도로 상황이 너무 여의치 않아서 국장도감은 어깨에 메는 대여로 바꾸어서 왕의 옥체를 운구하였다. 이외에도 수레는 건축 현장에서 자재를 옮기고, 전차(戰車)와 화포(火炮)를 운반하는 등 다양하면서도 효율적으로 쓰였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서는 화성을 축성하면서 평차(平車)와 발차(發車)를 사용한 내용을 기술하였다. 이는 조선시대 건축 공사 현장에서도 수레를 사용해서 작업의 효율성을 상당히 높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각 해당 관청은 거장을 현장에 배치해서 매우 효율적으로 적시에 활용했을 것이며, 거장의 역할은 운송 수단 등의 변화와 함께 변하였을 것이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속록(大典續錄)』
-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 『정조국장도감의궤(正祖國葬都監儀軌)』
- 장경희, 「朝鮮後期 凶禮‘都監’의 匠人硏究」, 『미술사논단』 8, 한국미술연구소,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