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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운관(書雲觀)에서 물시계를 담당한 관리.

개설

장루(掌漏)는 고려 및 조선시대 서운관의 종7품직으로 궁중의 물시계인 누각(漏刻)을 관리하고 제사 시각 등을 정하는 일을 맡은 관직이다. 1466년(세조 12)의 관제 경정 때에 서운관을 관상감(觀象監)으로 고치면서 장루가 직장(直長)으로 개칭되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전기 천문관서인 서운관은 세조 때 관상감으로 개칭되기 전까지 천문(天文)·역수(曆數)·측후(測候)·각루(刻漏)의 일을 맡아보았는데, 관원으로는 정3품 판관(判官)을 비롯하여 종3품 정(正), 종4품 부정(副正), 종5품 승(丞), 종6품 주부(注簿) 2명, 겸주부(兼注簿), 종7품 장루(掌漏) 2명, 정8품 시일(視日) 3명, 종8품 사력(司曆) 3명, 정9품 감후(監候), 종9품 사신(司辰) 등을 두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서운장루라고 지칭되는 관직은 서운관의 장루직을 의미한다.

조선시대 물시계는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후 새로운 표준시계가 요청되어 1398년(태조 7) 5월에 종로에 종루(鐘樓)가 세워지고 그 옆에 새로운 경루(更漏)가 설치된 것이 최초이다. 이 경루는 고려말에 사용되었던 부루(浮漏)와 같은 수수형 물시계로 추정되며, 이 물시계를 이용해서 시각을 측정해 서운관의 관원인 장루와 함께 물시계를 관리한 사신(司辰)이 종루에 걸어놓은 큰 종을 쳐서 경점(更點)을 알렸다. 장루는 물시계 관리 외에 왕실 의례와 관련하여 제사 시각을 담당하는 업무가 있었다. 1416년(태종 16)에 태종이 단오별제(端午別祭)를 행하고, 서운부정(書雲副正) 김후(金候)·장루(掌漏) 박영생(朴英生) 등을 의금부에 가두었는데, 이들이 제사를 행할 시각을 잘못 보고했기 때문이었다(『태종실록』 16년 5월 3일).

변천

물시계의 기원은 오래되어 한국의 경우 718년(신라 성덕왕 17)에 처음으로 누각을 만들고, 이를 관리하는 기관으로 누각전(漏刻典)을 설치하여, 박사 6인과 사(史) 1인의 관원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기록상으로는 이것이 한국 최초의 누각이지만, 이보다 앞서 554년에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천문학자[曆博士]들의 지도를 받은 일본에서 671년에 누각이 제작되고, 누각박사·역박사 등이 제도화된 점으로 미루어, 백제에서는 이미 7세기에 누각이 제작되고, 누각박사의 관직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시대의 누각은 시(時)와 오경(五更)을 알아내는 정도의 원시적인 것이었으나, 고려·조선을 거쳐 발전되면서 시계로서의 기능을 다하였고 장루(掌漏)가 물시계를 담당하였다. 세조 이후 서운관이 관상감으로 바뀌면서 장루가 직장(直長)으로 개칭되었다.

참고문헌

  •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
  • 『서운관지(書雲觀志)』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김일권, 『하늘의 역사』, 예문서원, 2007.
  • 나일성, 『한국천문학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 남문현, 「혼천의, 자격루, 측우기」, 『한국사시민강좌』23, 1998.
  • 남문현, 『장영실과 자격루』, 서울대출판부, 2002.
  • 이은성, 『역법의 원리분석』, 정음사, 1985.
  • 전상운, 『세종문화사대계』2,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0.
  • 정성희, 『우리 조상은 하늘을 어떻게 생각했는가』, 책세상, 2000.
  • 정성희, 『조선후기 우주관과 역법의 이해』, 지식산업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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