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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53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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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수술관 |
한글표제 | 수술관 |
한자표제 | 修述官 |
상위어 | 관상감(觀象監), 역법(曆法) |
동의어 | 삼력수술관(三曆修述官) |
관련어 | 교식(交食), 월식(月食), 일식(日食) |
분야 | 문화/과학/천문 |
유형 | 직역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왕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정성희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수술관(修述官)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고종실록』 23년 10월 22일, 『숙종실록』 32년 10월 27일 |
조선시대 일식과 월식을 관측하는 일을 맡았던 관상감(觀象監) 소속의 관원.
개설
수술관(修述官)은 일식과 월식의 계산 및 관측을 담당하는 관원으로 1770년(영조 46)에 처음 생겼다. 처음 일식과 월식은 담당자 1명을 두어 삼력관(三曆官)이 윤번으로 맡았으나, 1741년(영조 17) 삼력관의 인원이 30명으로 확정되면서 교식(交食) 계산 시험을 통해 우수한 자를 취해 임명하도록 했으며, 1770년에 수술관을 설치했다.
내용 및 특징
수술관은 삼력관보다 훨씬 늦은 1770년에 처음으로 설치되었으며, 전함(前銜) 등이 수술관으로 승진하다가 1775년(영조 51)에 영감사(領監事)한익모(韓翼謨)가 수술관을 직접 임명하면서 수술관 취재가 유명무실해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1777년(정조 1)에 다시 종전과 같이 전함 등이 합동으로 혼시(混試)할 수 있도록 했는데, 변동된 원인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조선후기에 와서 수술관이 신설된 것은 조선후기에 역법이 발전한 것과 관련이 있다. 효종 연간에 시헌력이 도입되고 1708년(숙종 34)에 시헌력오성법(時憲曆五星法)을 사용하는 한편, 역관(曆官) 허원(許遠)을 연경 흠천감에 보내어 시헌칠정표(時憲七政表)를 구입케 하는 등 시헌력법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1744년(영조 20)에는 허원에 의해 도입된 종래의 튀코 브라헤의 방법 대신 카시니신법을 역서 작성에 도입했다. 카시니신법은 당시 중국에 예수회 선교사로 와 있던 대진현(戴進賢, [I. Kögler])이 펴낸 『역상고성후편(曆象考成後篇)』에 들어 있던 최신의 천문학이었다. 이 책이 완성된 것이 1742년이었으니, 2년이 안 되어 최신의 역법이 조선에 도입된 것이다. 이와 같이 조선은 꾸준히 중국으로부터 최신의 역법을 도입했는데, 수술관의 신설은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한 결과인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후기 관상감의 기술직 중 역서의 발간과 관련하여 전문적인 천문관원은 삼력관, 수술관, 추보관(推步官)으로서, 이 가운데 삼력관은 성력(星曆)의 계산을 담당했고, 수술관은 교식의 추보(推步), 추보관은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의 추보를 맡았다. 수술관도 삼력관과 마찬가지로 시헌력의 일월식과 관련하여 자문을 구하고자 중국 사신단에 합류하여 중국에 가곤 했다(『고종실록』 23년 10월 22일).
수술관의 선발은 음양과 출신만이 취재에 응시할 수 있을 정도로 선발이 까다로웠다. 수술관에 결원이 생기면 관상감으로부터 후보자 추천을 받아 당상관 이하가 회권(會圈)하여 3권(圈) 이상을 얻은 자를 응시하게 하게 했으므로 응시자격이 매우 까다로웠다고 할 수 있다. 시험 날짜는 대체로 춘추중월(春秋仲月)인 음력 2월과 8월에 실시되었으며 영사(領事)와 제조(提調)가 이를 주관했다. 봄에는 삼경(三經) 중에 자원하는 1경(一經)과 칠정(七政) 중에 일(日)·월(月)·토(土)·목(木)을 시험하고, 가을에는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에서 택일하고 칠정의 일·화·금·수를 시험하여 수술관을 선발했다. 수술관은 특히 칠정의 계산을 맡았는데, 이들 수술관을 칠정수술관(七政修述官)이라 불렀으며 정원은 7명이었고 칠정력(七政曆)의 편찬을 맡았다(『숙종실록』 32년 10월 27일).
처음에는 정원이 없었으나 1741년(영조 17) 30명으로 정하고, 다음 해 5명을 더하여 35명으로 하였다가 1798년(정조 22) 5명을 감하여 다시 30명으로 되었다. 인원은 윤선과강지법(掄選課講之法), 즉 강독(講讀) 시험을 통해 선발했다.
변천
수술관의 정원은 12명으로 삼력관과 천문학전함(天文學前銜)이 각각 6명씩 맡았다. 그 뒤 정원을 6명으로 줄였는데, 그중 2명은 삼력관이 겸임하고, 4명은 전함에서 임명하였다. 1787년(정조 11) 삼력관이 겸임하던 2명을 전함에 소속시켜, 6명 정원 모두 전함에서 임명하였다.
이때부터 삼력관 선발시험에는 수술관만이 응시하도록 하였으므로 수술관을 거쳐 삼력관으로 승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1791년(정조 15)에는 과시(科試)와 승차(陞差) 등의 법을 정하였다. 현존하는 『운과방목』에는 1753년(영조 29) 천문학 전공 합격자 안사일(安思一) 이후 93명의 합격자 관력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들 중 70명이 수술관 출신의 삼력관을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 『운과방목(雲科榜目)』
- 『서운관지(書雲觀志)』
- 정성희, 「조선후기 역서의 간행과 반포」, 『조선시대사학보』 23,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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