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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관상감(觀象監)에서 풍수지리 업무를 맡아보던 정9품의 지리학 관리.

개설

훈도(訓導)는 원래 태조 때 한양의 사학과 향교의 교육을 담당하는 직책이다. 지리학훈도(地理學訓導)는 관상감에서 음양과의 풍수지리 직무와 관원들 교육을 담당했다. 지리학훈도는 음양풍수학 과시를 통해 2명이 선발되다가 풍수학이 지리학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1명이 선발되었다. 후보를 추천할 때는 천문학과 지리학 관원들이 모여서 후보자의 이름 아래에 점을 찍는 권점(圈點)으로 임용 여부를 결정했다. 1791년(정조 15)에 지리학 실관(實官) 7명 중에서 추천, 임명하는 것을 규정으로 정했다.

담당 직무

지리학훈도는 관상감에서 지리학교수와 함께 풍수지리술을 바탕으로 왕실의 능묘 입지와 주변 산수 형세의 길흉 판단, 태실(胎室)의 위치 선정과 보수, 천장(遷葬)이나 하관(下官)할 곳을 찾고 길일(吉日)을 가리는 등의 풍수지리 제반 업무를 수행하였다. 또 풍수지리 관련 교육을 담당하였다.

변천

태종 때 음양풍수학 과목이 마련되어(『태종실록』 7년 3월 24일), 관상감에서 음양학 과시를 통해 체아직(遞兒職) 2명, 훈도 2명, 생도(生徒) 18명을 뽑았다. 성종 때 관상감 제조의 건의에 따라 음양학 체아직 2명을 지리학에 소속시키고 관상감의 학문과 기술을 익히던 임관 전의 생도를 지리학훈도에 소속시켰다(『성종실록』 5년 11월 27일). 또 세조 때 “풍수학은 지리학으로 이름을 고쳐서 교수와 훈도 한 명씩을 둔다.”는 제도 아래 겸훈도관(兼訓導官)을 훈도로 바꾸었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1791년에 지리학훈도는 지리학 업무를 맡아보던 실관 7명 중에서 추천, 임명하였다. 지리학 실관은 지리학 분과의 임시 차출직 중 하나였다. 19세기 중엽에 지리학 실관들에게 상지관(相地官)이라는 이름이 부여되었다.

조선시대에 적은 재정으로 많은 수의 관원을 유지하기 위해 무보수로 일하는 체아직에서, 지리학교수와 훈도를 지낸 관원들 가운데 정9품 서반(西班) 체아직(遞兒職)인 사용(司勇) 자리, 즉 간산체아(看山遞兒)를 돌아가며 맡았다. 지리학훈도는 잡과 출신에게 정부에서 주는 급여인 요식(料食)을 받았다(『정조실록』 15년 10월 27일).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김두규, 『조선 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 궁리, 2000.
  • 성주덕 편저, 이면우 외 역주, 『서운관지』, 소명출판, 2005.
  • 최창조, 『한국의 풍수지리』, 민음사, 1993.
  • 한국과학사학회 편, 『서운관지·국조역상고』, 성신여자대학교 출판부, 1982.
  • 유경로, 「서운관지의 번역, 주 및 해설 3:천거·과시·취재」, 『한국과학사학회지』, 한국과학사학회, 1991.
  • 이몽일, 「한국 풍수지리 사상의 변천과정」, 경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1.
  • 이수동, 「조선시대 음양과에 관한 연구」, 원광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
  • 장성규, 「『조선왕조실록』의 풍수지리문헌 연구:『청오경』·『금낭경』·『호수경』을 중심으로」, 공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 조승구, 「조선초기 서운관의 기능과 변천」, 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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