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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51 기준 최신판



자기의 태토(胎土)와 유약의 원료인 점토와 물토 등을 캐서 정선하는 일을 담당하는 장인.

개설

취토장(取土匠)은 자기 제작에 필요한 백토의 수급을 담당하고 있었다. 백토는 자기의 품질을 결정짓는 중요한 원료이기 때문에 조선초부터 중앙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1466년(세조 12)에는 공조에서 올린 백토 도용(盜用) 방지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백토에 대한 문헌 사료는 숙종 때부터 자주 등장한다.

담당 직무

취토장은 백토 굴취와 수급에 관련된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1413년(태종 13) 7월 16일의 기사를 보면 전라도 지역에서 매해 자기를 제작하여 바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태종실록』 13년 7월 16일). 이처럼 자기 제작에 필요한 원료인 백토는 조선초부터 중시되었는데, 광주에 분원이 위치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현지에서 다량의 백토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 역시 백토 수급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867년(고종 4)에 편찬된 『육전조례(六典條例)』에 분원 관요로 운반되는 1년의 백토량이 2,095석에 이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취토는 장인뿐 아니라 산지의 백성들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이로 인해 백토 산지의 백성은 백토 굴취와 운반 노역에 동원되어 생업에 종사하기 어려울 정도였다(『숙종실록』 39년 7월 20일), (『숙종실록』 40년 8월 23일), (『영조실록』 17년 6월 4일), (『영조실록』 19년 1월 18일).

변천

취토장은 분원 장인 가운데 원료 채취와 간품(看品)을 맡는 중요한 직책이나, 조선후기 들어서는 산지의 백성들이 원료 채취와 운반을 맡는 경우가 증가하였다. 따라서 운반 전에 분원 낭청이 파견되어 원료를 검품하는 일을 맡았다. 조선말기 분원의 상황을 기록한 『분주원보등(分廚院報騰)』에는 취토장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점차 그 기능을 다른 장인들이 겸임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육전조례(六典條例)』
  • 김영원, 『조선시대 도자기』,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3.
  • 방병선, 『왕조실록을 통해 본 조선도자사』, 고려대학교출판부,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