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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50 기준 최신판



장악원 소속의 예술 감독이자 악공들의 스승.

개설

악사(樂師)는 악공을 거친 인물로, 장악원의 잡직(雜職) 최고직인 정육품직(正六品職) 전악(典樂)과 종육품직(從六品職) 부전악(副典樂)에 임용되었다. 악사는 장악원 악인(樂人)의 대표로서 실제 음악 연주를 이끄는 위치에 있었다.

담당 직무

악사는 각종 궁중 의례와 연향을 준비하며 행사 시 악기 연주와 노래, 춤 등 전체 공연을 이끌었다. 악서(樂書)와 악보 편찬에 참여하고, 음악 정책을 제안하며, 감조전악(監造典樂)으로서 악기 제작을 추진하기도 했다. 장악원 첨정 안상(安瑺)과 함께 『금합자보』를 편찬한 악사 홍선종(洪善終)은 보법(譜法)에 통달했다. 박곤(朴𦓼)과 김복근(金福根)은 성종 당시 전악으로서 『악학궤범』 제작에 참여하였다.

또한 악사들은 중국에 파견되어 악기를 구입하고 악기 제조법과 연주법 등을 배워 와서 이를 국내의 악공들에게 전수하는 역할을 했다. 영조대 이후에는 각종 의례와 연향에서 악장을 창(唱)했다.

1778년(정조 2)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악생과 악공의 스승으로서 모든 악인이 출근하여 연습하는 2일과 6일의 개좌(開坐) 때 악인들의 실력을 확인했다. 이때 재능이 없다는 평가를 받은 악인은 그 경중에 따라 상·중·하 3가지 벌을 받기도 했다.

변천

『경국대전』에 따르면, 전악은 1명으로 악사이며, 부전악은 2명으로 1명은 악사이고 1명은 악생이나 악공이라고 되어있다. 음악을 유흥의 도구로 삼은 연산군 때는 전악을 총률(摠律)이라 했는데, 1505년(연산군 11)에는 총률을 20명 더하라고 명했다(『연산군일기』 11년 3월 15일). 『속대전』에는 우방(右坊) 악사가 5명으로 되어있다.

한편, 고종대의 현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이는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사직단 대제(大祭)에 협률랑, 집사악사(執事樂師), 집주악사(執籌樂師), 도창가전악(導唱假典樂)과 악생들이 참여했다. 가전악 중에서 악사를 뽑았으므로 악사가 가전악 위의 직위에 있었음을 암시한다. 『장악원악원이력서(掌樂院樂員履歷書)』에도 전악이 승진한 직위명으로 악사를 사용되고 있다.

고종대에 양악대가 설치된 이후 ‘악사’라는 용어는 양악의 악사를 뜻하였고, 전통 음악을 연주하는 ‘악사’는 국악사라고 불러 구분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장악원악원이력서(掌樂院樂員履歷書)』
  • 국립국악원 편, 『역대 국립음악기관 연구: 신라 음성서에서 국립국악원 개원까지』, 국립국악원, 2001.
  • 송지원, 「조선시대 장악원의 악인과 음악교육 연구」, 『한국음악연구』 43, 2008.
  • 이정희, 「조선시대 장악원 전악의 역할」, 『한국음악연구』 40,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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