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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49 기준 최신판



서양의 교회가 포교(布敎)를 목적으로 파견하였던 선교사를 조선에서 일컫던 말.

개설

선교승(宣敎僧)은 선교를 하는 승려의 줄인 말이다. 미국과 캐나다의 신교 세력이 개항 이후 조선에 들어오기 전에 선교승은 천주교 신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19세기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동양을 산업 상품 수출 및 원료 확보를 위한 기지로 삼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침략을 시도하였다. 군대를 앞세워 무력을 내세우기도 하고 신앙의 자유를 빙자하여 고유 사상에 혼란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조선에 최초로 온 선교사는 임진왜란기에 왜군과 같이 온 포르투갈 신부라고 볼 수 있다. 선교사들은 서양인 외에 중국인도 있었는데, 1794년(정조 18) 의주를 통해 잠입한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대표적이다.

내용 및 특징

19세기 초 교황청이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갖고 있던 선교 보호권을 무시하면서 새로운 선교 지역을 설정해 나가자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저항이 일어났다. 이들은 프랑스 선교사들의 이동을 방해하거나 조선에 입국하는 것을 막기도 하였다. 1838년 만주와 요동 지방의 선교를 북경에서 분리시키고 파리외방전교회(巴里外邦傳敎會, La Société des Missions-Etrangéres de Paris)에서 전담하기로 하여 조선의 포교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전담하게 되었다.

한편 조선 왕조에서는 이들의 포교를 용인하지 않았다. 주자성리학적 세계관에서 제사를 거부하고 조상 숭배를 배제하는 천주교식 사고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 왕조가 전통적 사상 체계에 반하는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자 선교사를 파견했던 국가에서는 무력행사를 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인 병인양요(丙寅洋擾)이다. 병인양요는 프랑스 선교사들을 조선 정부가 처형한 것이 원인이었다. 조선 정부는 1839년(헌종 5)에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3명의 선교사들을 처형하였다. 프랑스 정부는 이를 빌미로 1866년(고종 3)에 함대를 동원하여 강화도를 공격하였다. 당시까지 조선에 밀입국한 프랑스 선교사는 대략 20여 명에 달했다. 이들은 1836년 1월부터 1865년까지 중국을 거쳐 육지로는 의주, 해로로는 내포와 강경 등으로 잠입하였다.

1876년(고종 13)에 조선 왕조가 일본의 포함 외교에 따른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고 개항을 하자 선교사들의 입국이 용이해졌다. 물론 이들이 입국하자마자 체포되기도 하였으나 청국과 일본이 외교적 문제의 소지가 될 선교사 탄압을 중지하라고 권유하여 추방시키기만 하였다(『고종실록』 15년 6월 6일). 1886년(고종 23) 조선 왕조가 프랑스와 조불수호통상조약(朝佛修好通商條約)을 맺으면서 선교사의 전교 활동이 공식적으로 인정되기에 이른다.

참고문헌

  • 『일성록(日省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국사편찬위원회, 1967.
  • 러시아대장성 저, 김병린 역, 『구한말의 사회와 경제: 열강과의 조약』, 유풍, 1983.
  • 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
  • 임경석·김영수·이항준, 『한국근대외교사전』, 성균관대학교, 2012.
  • 조현범, 『조선의 선교사, 선교사의 조선』, 한국교회사연구소, 2008.
  • 김규성, 「19세기 전·중반기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 시도와 서해 해로」, 『교회사연구』32, 2009.
  • 차기진, 「김대건 신분의 활동과 업적」, 『교회사연구』12,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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