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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48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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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부봉사 |
한글표제 | 부봉사 |
한자표제 | 副奉事 |
상위어 | 봉사(奉事), 실직(實職), 참하관(參下官) |
하위어 | 관상부봉사(觀象副奉事), 광흥부봉사(廣興副奉事), 군기부봉사(軍器副奉事), 군자부봉사(軍資副奉事), 내의부봉사(內醫副奉事), 봉상부봉사(奉常副奉事), 사역부봉사(司譯副奉事), 선공부봉사(繕工副奉事), 전의부봉사(典醫副奉事), 제용부봉사(濟用副奉事), 종묘부봉사(宗廟副奉事), 참봉(參奉), 풍저부봉사(豊儲副奉事), 훈도(訓導) |
관련어 | 감후(監候), 검약(檢藥), 녹사(錄事), 부녹사(副錄事), 직장(直長) |
분야 | 정치/행정/관직·관품 |
유형 | 직역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이근호 |
관품 | 정구품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부봉사(副奉事)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성종실록』 24년 12월 2일, 『선조실록』 21년 8월 2일, 『선조실록』 36년 2월 4일, 『선조실록』 36년 6월 1일 |
봉상시(奉常寺)를 비롯해 내의원(內醫院)·군기시(軍器寺) 등에 두었던 정9품 관직.
개설
부봉사(副奉事)는 1466년(세조 12)의 관제 개정 당시 처음 등장한 관직으로, 각 관서마다 설치 경위가 달랐다. 봉상시는 직장을, 군기시는 녹사를, 선공감은 부녹사를, 관상감은 감후(監候)를, 전의감은 검약(檢藥)을 개칭한 것이며, 내의원과 군자감·풍저창·광흥창의 부봉사는 새롭게 설치되었다.
이후 『경국대전』에서는 봉상시·내의원·군기시·군자감(軍資監)·제용감(濟用監)·선공감(繕工監)·관상감(觀象監)·전의감(典醫監)·사역원(司譯院)·풍저창(豊儲倉)·광흥창(廣興倉)·종묘서(宗廟署) 등의 소속으로 규정되었고, 품계는 정9품이었다. 정원은 관서마다 달라, 내의원과 사역원은 2명, 관상감은 3명, 전의감은 4명이며 다른 관서는 각 1명씩이었다.
담당 직무
부봉사는 각 관서의 주요 실무를 관장하였던 듯하다. 예를 들어 제용감 부봉사는 제용감에 부속된 창고인 천자고(千字庫)를 감독하면서, 아울러 호피(狐皮)나 장피(獐皮) 등의 관리를 담당하였고(『성종실록』 24년 12월 2일), 중국에 진헌하는 물품의 품질 검사[看品]를 담당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21년 8월 2일). 또한 군자감 부봉사는 보관된 곡식의 관리를 담당하였고(『선조실록』 36년 2월 4일), 선공감 부봉사는 궁궐 및 왕실·관청의 수리 및 필요한 목재 등의 관리를 담당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36년 6월 1일).
변천
『경국대전』 반포 이후 부봉사는 각 관서마다 필요에 따라 증감이 있었다. 연산군대에는 군기시와 예빈시·광흥창·종묘서·전생서·의영고 등에 부봉사가 추가로 설치되기도 하였다. 영조대 편찬된 『속대전』에서는 군자감 부봉사가 혁파되고 관상감과 전의감은 각 2명씩 정원이 감축되었다. 정조대 편찬된 『대전통편』에서는 광흥창 부봉사가 혁파되었다.
고종대인 1869년(고종 6)에 종친부와 돈녕부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부봉사직에도 변화가 있었다. 즉 품계는 종8품으로 규정되면서, 종친부 부봉사는 적왕손의 서중자(庶衆子)들에게 처음으로 제수되었고 15개월이 차면 다른 관청에 차례대로 옮겨 주며 품계를 올려주었다. 돈령부 부봉사는 왕세자의 적녀인 군주(郡主)의 사위와 왕세자의 서녀(庶女)인 현주(縣主)의 아들, 적왕손의 첩의 사위에게 처음으로 제수하는 관직으로 규정하였다.
1894년(고종 31)의 갑오개혁 과정에서 다시 한 차례 변화가 있었다. 그리하여 종정부 부봉사는 왕자의 현손, 적왕손의 여러 증손들, 왕손의 증손들을 처음 임명하였다. 임기가 차면 다른 관직으로 옮겨주고[遷轉] 해당하는 사람이 없으면 비워두도록 하였다. 돈령원 부봉사는 왕손의 여러 사위가 당연직으로 임명되며 해당하는 사람이 없으면 비워두도록 규정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육전조례(六典條例)』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