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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44 기준 최신판



왕이 주관하는 문과 전시와 친시의 하급 시관.

개설

왕이 친히 주관하는 문과 전시(文科殿試)나 알성시(謁聖試)·정시(庭試)·중시(重試) 등의 시관은 초시나 회시와 달리 독권관(讀券官)과 대독관(對讀官)으로 일컬었다. 대독관은 정3품 이하의 문관이 담당하며 종2품 이상의 관원이 담당하는 독권관(讀券官)을 보좌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담당 직무

왕이 직접 주관하는 문과 전시나 알성시·정시·중시 등은 독권관이 왕을 대신하여 출제·감독·채점 등을 주관하고 우수한 답안을 왕에게 추천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대독관은 보다 하급의 관료로서 독권관을 보좌하였다.

변천

고려의 과거제에서는 예부시를 주관한 지공거(知貢擧)와 동지공거(同知貢擧)가 선발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1369년(공민왕 18)에 전시제도가 도입된 후인 1388년(우왕 14)에는 전시고시관(殿試考試官) 2명을 따로 둔 것으로 확인되었다.

조선에서는 왕이 주관하는 전시(殿試)를 제도화하고 전시의 시관을 별도로 선임하였다. 그러나 개국 초기부터 전시 시관을 두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독권관과 대독관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407년(태종 7) 문신 친시 때였다(『태종실록』 7년 4월 18일). 이 후로는 문과 전시에도 별도의 시관을 두었다. 그러나 대독관을 두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이 시기 대독관은 특별한 임무를 맡기 위하여 임시로 임명되던 차비관(差備官)의 일종으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전시대독관의 존재가 분명하게 확인되는 것은 세종대부터였다. 1420년(세종 2) 식년시 전시 때 독권관 3명과 함께 대독관 2명을 둔 이래로 대독관이 전시의 시관으로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세종실록』에 수록된 「문과전시의(文科殿試儀)」에는 독권관은 예조·예문관·집현전의 2품 이상, 대독관은 예조 참의, 예문관·집현전의 3품 이상 관원과 승지, 예조 정랑 가운데 선임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오례 가례 의식 문과 전시의].

대독관의 자격 조건이나 인원수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변화하였다. 영조대 『속대전』에는 문과 전시의 대독관은 정3품 이하 4명, 시험 당일 급제자를 발표하는 알성시·정시 등의 대독관은 20명으로 수록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속대전(續大典)』
  • 이성무, 『한국의 과거제도』, 집문당, 2000.
  • 조좌호, 『한국과거제도사연구』, 범우사, 1996.
  • 허흥식, 『고려의 과거제도』, 일조각, 200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