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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44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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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내금위장 |
한글표제 | 내금위장 |
한자표제 | 內禁衛將 |
동의어 | 내금장(內禁將) |
관련어 | 금군장(禁軍將), 금군청(禁軍廳), 내금위(內禁衛), 용호영(龍虎營) |
분야 | 정치/행정/관직·관품 |
유형 | 직역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시대 |
왕대 | 조선시대 |
집필자 | 윤훈표 |
관품 | 종이품, 정삼품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내금위장(內禁衛將)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즉위년 8월 12일, 『세종실록』 7년 2월 30일, 『세조실록』 3년 4월 1일, 『세조실록』 5년 8월 15일 |
조선시대 숙위군의 핵심이었던 내금위(內禁衛)의 최고 지휘관.
개설
초기에는 중앙의 숙위군 가운데 최정예였던 내금위의 최고 지휘관으로 기능하였다. 설립 당초에는 내금위 절제사(節制使)였으나 세조 때 중앙군 조직의 오위제 개편과 연관되어 내금위 장(將)으로 바뀌었다. 오위(五衛)와 독립하여 운영함으로써 상호 견제하게 했다. 종2품에 정원은 3명이었다. 임진왜란을 거치며 중앙 군제가 크게 개편되었는데 내금위는 금군청에 합속되었다. 이로 인해 최고 지휘관의 성격은 없어졌고 일개 지휘관 구실만 하게 되었다. 품계도 정3품으로 내렸다.
담당 직무
1407년(태종 7)에 궁중에 입직하여 숙위하던 군사를 통칭하였던 내상직(內相直)을 내금위로 고쳤다. 이를 통해 숙위군의 직임을 전일화시켜 금군(禁軍)의 강화를 시도했다. 초창기에는 6명의 내금위 절제사에 의해 통솔되었다. 임금을 가장 가까이에서 호위하는 병력이었기 때문에 절제사에는 신임이 두터운 인물들이 주로 임명되었다. 공신이나 종친 자제 중에서 발탁되는 경우가 많았다(『세종실록』 즉위년 8월 12일). 소속 인원들을 통솔하는데, 강무(講武) 때 매와 개, 그리고 화살 따위를 점검하는 일을 맡았던 것으로 보아 숙위 시 군장 검사도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세종실록』 7년 2월 30일).
1457년(세조 3) 3월에 중앙 군제를 오위로 개편하면서 그 다음 달 병조에서 내금위를 오위에 예속시키지 않고 절제사 6명을 내금위 장으로 개칭하고 오위 장과 더불어 똑같이 아문(衙門)을 설치하고 매번(每番)마다 2명의 장수가 아울러 궁궐 뜰에 의장을 설치하는 일을 하는 사금(司禁)을 거느리고 숙직하며 왕의 수레를 호위할 때는 왕에게 낙점을 받게 할 것을 건의했다. 더불어 내금위 장의 인(印)도 각각 1개씩 만들어 내려주자고 해서 임금의 승낙을 받았다(『세조실록』 3년 4월 1일).
하지만 즉각 시행되지 않았는지 2년 뒤인 1459년에 또다시 병조에서 내금위는 오위에 예속되지 않는다며, 절제사 3명을 내금위 장이라 일컫고 아문을 별도로 설치하여 매번마다 한 장수가 거느리고서 입직하게 할 것을 건의해서 역시 왕의 승인을 얻었다(『세조실록』 5년 8월 15일).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내금위를 오위에 소속시키지 않고 별도로 운영하여 상호 견제가 이루어지도록 만들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숙위군 가운데 최정예에 해당하는 내금위를 독립시켜 내금위 장으로 하여금 통솔시키되, 왕에게 직접 연결되도록 했다.
『경국대전』에서는 정원 3명으로 종2품이며 다른 벼슬이 있는 자가 겸직하게 했다. 또한 내금위는 5번으로 나눠 교대로 입직하는데, 그들을 통솔하는 내금위 장은 왕의 낙점을 받아 군사의 임무를 분담시키도록 하였다. 한편 병조·도총부의 당상관, 겸사복장(兼司僕將), 내금위 장은 비록 같은 아문이 아닐지라도 모두 상피(相避)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는 병권이 한 가문으로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변천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오위를 중심으로 편제되었던 중앙군 체제가 거의 마비되었다. 이로 인해 개편이 불가피해졌으며 내금위도 예외가 아니었다. 마침내 『속대전』에서는 내금위, 겸사복, 우림위를 합해 금군청(禁軍廳)을 설치하고 그 책임자로 종2품의 별장(別將) 1명을 두도록 규정되었다. 내금위 장의 경우 정원 3명은 유지되었으나 품계는 정3품으로 내렸다. 임기는 1년이었다. 전기처럼 내금위라는 최정예 병종의 최고 지휘관이라는 성격은 사라졌으며 단지 명칭만 간직한 채 금군청의 일개 지휘관으로만 기능하게 되었다.
또한 내삼청(內三廳)과 오위 장에 대해 병조에서 관할하는 일이 없어졌으므로 판서를 제외한 다른 당상관들과 서로 피하지 않도록 했는데, 내금위 장은 총관(摠管)과도 역시 하지 않아도 되도록 했다. 병권 운용의 중심축에서 멀어진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다. 1755년(영조 31) 금군청을 용호영(龍虎營)으로 개칭하였으나 별장은 계속해서 금군 별장이라 칭했다. 군영 명칭만 바뀌었을 뿐 조직에 큰 변화는 없었다.
1833년(순조 33) 내금위 군액을 300명에서 200명으로 축소하고 6번으로 만들면서 내금위 장도 1명 줄였다. 『대전회통』에는 정원이 2명으로 기록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민현구, 『조선초기의 군사제도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 차문섭, 『조선시대 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 최효식, 『조선후기 군제사 연구』, 신서원,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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