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중(建中)"의 두 판 사이의 차이
sillokwiki
(XML 가져오기) |
(차이 없음)
|
2017년 12월 10일 (일) 00:39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건중 |
한글표제 | 건중 |
한자표제 | 建中 |
분야 | 연호 |
유형 | 연호 |
지역 | 중국(中國) |
시대 | 당(唐) |
왕대 | 덕종(德宗) |
집필자 | 김가람 |
사용지역 | 중국-당 |
사용왕대 | 덕종 |
사용기간 | 780년~783년(덕종2~덕종5)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건중(建中) |
중국(中國) 당(唐)나라 덕종(德宗) 대에 사용한 연호(780년~783년).
개설
중국 당나라의 제 9대 황제인 덕종이 사용한 3개의 연호 가운데 첫 번째 연호이다(780년~783년).
건중(建中) 연간 동안 덕종은 조용조제(租庸調制)를 폐지하고 양세법(兩稅法)을 시행하는 등 재정 확보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과는 달리 이무렵 당나라는 여러 개의 난이 발생하여 매우 어수선하였다. 건중3년인 782년에는 회서 절도사이희열(李希烈)이 난을 일으켰고, 이어 건중4년인 783년에는 <건중의 난(亂)>이 발생하였다. <건중의 난>은 주비(朱沘)가 태위(太尉)가 되어 장안(長安)을 중심으로 모반을 꾸민 것으로, 결국 주비가 그의 장수에게 죽음을 당하면서 난은 평정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덕종은 연호를 건중에서 흥원(興元)으로 개원하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는 임금에게 정치에 더욱 신경 쓸 것을 건의할 때에 주로 이 사건을 언급한다. 아울러 덕종이 노기(盧杞) 등의 간신을 임용하여 이성(李晟)~육지(陸贄)와 같은 충신을 배척한 것을 가리켜 <건중의 조정(調停)>이라 하는데, 이것 또한 당쟁과 관련된 『조선왕조실록』 기사에 많이 등장한다.
한편 신라(新羅)에서는 선덕왕(宣德王)원년부터 선덕왕4년까지 이 연호를 사용하였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고종실록(高宗實錄)』
- 『구당서(舊唐書)』
- 이현종 편, 『동양연표(東洋年表)』, 탐구당,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