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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37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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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승성 |
한글표제 | 승성 |
한자표제 | 承聖 |
분야 | 연호 |
유형 | 연호 |
지역 | 중국(中國) |
시대 | 양(梁) |
왕대 | 원제(元帝) |
집필자 | 김가람 |
사용지역 | 중국-양 |
사용왕대 | 세조 |
사용기간 | 552년~555년(원제1~폐제1)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승성(承聖) |
중국(中國) 양(梁)나라의 원제(元帝) 대에 사용한 연호(552년~555년).
개설
중국 남북조(南北朝) 시대에 양나라의 제 4대 황제인 원제가 사용한 연호로(552년~555년), 555년 5월 폐제(廢帝)가 천성(天成) 연호를 사용하기 전까지 사용하였다.
양나라는 초대 황제인 무제(武帝)의 말년부터 각지의 반란 등으로 사회가 혼란스러워지다가, 사후에는 황위를 둘러싼 암투가 벌어지면서 그 혼란이 극에 달하였다. 552년 원제가 황위에 올랐지만, 각 지방 마다 독자 연호를 사용하는 등 사회 혼란은 여전하였다. 이런 가운데 554년 12월 서위(西魏)는 양나라를 공격하여 원제를 살해하고, 괴뢰 정권인 후량(後梁)을 세웠다. 이를 가리켜 <효원(孝元)의 패(敗)>라고 하며, 이 사건은 남조의 귀족 사회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 외에도 각지에서 왕을 옹립하는 등 양나라는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다가, 557년 결국 멸망하게 된다. 한편 중국 정사(正史)에서는 승성(承聖) 연호만 그 정통성을 인정하여, 이 시기의 모든 사건을 승성 연호로 기록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승성 연호로 연대(年代)를 표시하는데, 이것은 조선(朝鮮)이 독자 연호 대신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과거의 연대도 중국의 연대로 표시하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 『양서(梁書)』
- 이현종 편, 『동양연표(東洋年表)』, 탐구당,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