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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29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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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비갈 |
한글표제 | 비갈 |
한자표제 | 碑碣 |
하위어 | 기공비(紀功碑), 기념비(記念碑), 기적비(紀蹟碑), 능비(陵碑), 묘비(墓碑), 송덕비(頌德碑), 순수비(巡狩碑), 신도비(神道碑), 정려비(旌閭碑) |
관련어 | 마애(磨崖), 묘지명, 조상기(造像記) |
분야 | 교육·출판/출판/인장 |
유형 | 물품·도구 |
집필자 | 김희정 |
용도 | 기념(記念), 추모(追慕) |
재질 | 돌[石]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비갈(碑碣)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17년 3월 9일 |
기념이나 추모를 위해 사적(事蹟)을 새겨 세워 둔 돌.
개설
비(碑)와 갈(碣)의 구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분명하지 않다. 대체로 원형(圓形)인 것을 갈이라 하고, 사각형[方形]인 것을 비라 한다. 갈은 표면이 거친 원시형인 데 반하여, 비는 글자를 새기기 좋게 표면을 매끈하게 다듬고 형태도 직사각형[長方形]의 판석으로 만들었다. 갈은 주로 현지에서 구해 썼으나, 비는 먼 곳에서 운반해 오기도 하였다.
한대(漢代) 이전에는 갈이 많이 쓰이다가 후한(後漢) 시대부터 직사각형의 비를 쓰기 시작하였고, 위진남북조 시대부터는 비좌(碑座)와 비신(碑身)과 비수(碑首)를 모두 갖춘 형식으로 발전하였다. 비문(碑文)은 서주(西周) 시대 사적을 기록했던 청동기 명문(銘文)의 역할을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연원 및 변천
비는 본래 어떤 사적을 오래도록 후세에 전하기 위해 나무나 돌, 쇠붙이 등에 글을 새겨 세워 놓은 것을 이른다. 비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다음 설들이 유력하다.
첫째, 『의례(儀禮)』「빙례(聘禮)」 ‘상당비(上當碑)’의 주(注)에 “궁에는 반드시 비가 있으니 해의 그림자를 보고 음양의 성쇠를 끌어내기 위한 것이다.”라고 한 것처럼, 궁궐의 뜰에 돌기둥을 세워 그 그림자를 보고 시각을 알던 해시계 같은 역할을 하다가 나중에 거기에 글자를 기록함으로써 비의 기원이 되었다는 설이다.
둘째, 『예기(禮記)』「제의(祭儀)」에 “종묘의 제삿날에 임금이 희생(犧牲)을 끌고 와 묘문에 들어서면 이것을 비에 매어 놓는다.”고 한 것처럼, 돌기둥을 종묘나 사당의 문 앞에 세워 제사에 쓸 희생을 매어 놓는 데서 비롯했다는 설이다.
셋째, 『예기』「단궁(檀弓)」(하)에 “공실의 장례에는 천자의 풍비에 준하는 것을 쓰고, 삼가(三家)의 장례에는 제후의 환영(桓楹)에 준하는 물건을 쓴다.”라고 한 것처럼, 옛날에 장사 지낼 때 관을 무덤 속에 안전하게 내려놓기 위해서 상단 중간에 구멍 하나를 뚫은 키 큰 석판을 묘혈의 네 모서리에 곧게 세우고 이 구멍에 굵직한 끈을 의지하여 관을 천천히 내려놓던 돌기둥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다. 그래서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비(碑) 자를 세워진 돌[竪石]이라고 설명하였고, 한나라 이전의 고서(古書)들에서는 비(碑) 자는 대개 서 있는 석판을 의미하였다.
대략 서한(西漢) 시대 말기부터 석판에 문자를 새긴 것으로 보인다. 이때는 무덤 속 주인[碑主]의 성명·직위·생몰연월 등을 기록하여 무덤 앞에 세워 놓았는데, 이는 석비(石碑)라기보다는 묘표(墓表)에 불과했다. 이후 석판 위에 새긴 글의 내용이 점점 많아져 묘주의 성명과 집안 내력, 생애와 업적 등을 상세히 기술하고 망인을 애도하고 찬미한 시를 더하였다. 전편의 전기(傳記)와 후편의 시명(詩銘)을 합해 묘비명(墓碑銘)이라 부른다. 이러한 묘비명을 통해 묘주가 어떤 인물인지를 자세히 알 수 있다. 이러한 석판을 묘비(墓碑)라 하므로, 묘비는 묘표가 발전한 것이다. 그 뒤 비의 의미가 변하여, 문자가 새겨진 석판을 비라 하고 문자를 새기지 않은 것은 비에 포함하지 않았다.
비의 종류는 묘비(墓碑)·능비(陵碑)·신도비(神道碑)·기적비(紀蹟碑)·기념비(記念碑)·순수비(巡狩碑)·정려비(旌閭碑)·송덕비(頌德碑) 등이 있으며, 그 밖에도 유허(遺墟)·성곽(城廓)·대단(臺壇)·서원(書院)·묘정(廟庭)·빙고(氷庫)·교량(橋梁)·제지(堤池) 등에 세우는 기공비(紀功碑)가 있다.
비갈은 종류마다 각각의 목적이 있으나, 조선에서는 비를 세워 공덕을 칭송하고 훈계의 내용을 새겨 후세에 보이는 것을 예로부터 제왕의 아름다운 법으로 여겼고(『세종실록』 17년 3월 9일), 당사자의 공덕을 칭송하고 그 뜻을 기려 후대에 모범으로 삼고자 하였다.
형태
돌에 글자가 새겨진 것으로는 비갈뿐만 아니라 마애(磨崖), 묘지명, 조상기(造像記) 등이 있다. 마애는 자연석에 문자를 새긴 것, 묘지명은 가로 세로 약 60~70㎝ 정도의 납작한 사각형 석판에 비와 같은 내용을 새겨 묘 속에 묻은 것을 말한다. 조상기는 시주한 사람의 신분과 공덕을 비는 내용을 불상의 뒷면이나 옆 벽면에 새겨 놓은 것을 말한다.
참고문헌
- 錢存訓 저·김윤자 역, 『중국고대서사』, 동문선, 1993.
- 진광호, 『문자학개론』, 도서출판 민족문화, 1997.
- 施蟄存, 『金石叢華』, 中華書局, 1991.
- 梁披雲 主編. , 『中國書法大辭典』, 書譜出版社, 1985.
- 周俊杰 等, 『書法知識千題』, 河南美術出版社,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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