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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29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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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대보 |
한글표제 | 대보 |
한자표제 | 大寶 |
상위어 | 인장(印章), 새(璽), 보(寶) |
관련어 | 국새(國璽), 어보(御寶),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 황제어새(皇帝御璽), 황제지보(皇帝之寶), 황제지새(皇帝之璽) |
분야 | 교육·출판/출판/인장 |
유형 | 물품·도구 |
집필자 | 성인근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대보(大寶)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조실록』 2년 3월 9일, 『태조실록』 4년 11월 11일, 『태조실록』 5년 3월 29일, 『정종실록』 2년 9월 19일, 『태종실록』 1년 3월 6일, 『태종실록』 3년 4월 2일, 『숙종실록』 38년 10월 26일, 『정조실록』 10년 4월 11일 |
전근대 국새(國璽)를 이르는 말.
개설
대보(大寶)는 전근대 국새의 다른 이름이다. 국새는 국가 최고통치자의 인장인 동시에 국가의 상징이다. 삼국시대에는 대보·국새 등으로 불렸고, 고려시대에는 국새·국인(國印)·어보(御寶)·새보(璽寶) 등 다양한 용례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전에 사용하던 용어는 물론 새(璽)와 보(寶)를 국가와 왕실 인장의 대명사로 사용하였다. 다만 ‘국새’와 ‘대보’만은 국가를 상징하는 인장의 의미로 한정하였다.
한반도에서 국새를 사용한 기록은 고구려부터 보이며, 고려에서는 거란·요·금·원·명으로부터 책봉과 함께 인수하였다. 조선의 국새는 대부분 명·청의 황제들에 의해 책봉과 동시에 사여되었고, 국왕문서용 국새는 국내에서 제작하였다. 1392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고려의 국새를 명나라에 반납하고, 새로 내려주기를 여러 차례 요청하였다. 그러나 태조 당대에는 실현되지 않다가, 태종대에 금제(金製)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을 받았다. 이 국새는 인조대까지 주로 명나라와의 외교문서에 사용하였으며, 이후 두 차례 더 중국으로부터 받았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이후에는 청나라에서 받은 국새를 사용하였다. 숙종대에는 명나라에서 준 옛 국새의 자취를 찾아 별도로 모조해 감추어 두고 왕위 계승에만 사용하기도 하였다. 대한제국 이후에는 청나라와 사대·책봉 관계를 끝냄으로써 이전의 대보를 폐지하고, 대한국새(大韓國璽)·황제지새(皇帝之璽)·황제지보(皇帝之寶)·황제어새(皇帝御璽) 등을 국내에서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연원 및 변천
조선 개국 이전부터 친명노선을 추구하던 이성계는 즉위 다음 해인 1393년(태조 2)에 이념(李恬)을 명나라에 보내 고려의 국새를 반납하였고(『태조실록』 2년 3월 9일), 2년 후인 1395년(태조 4) 태학사정총(鄭摠)을 파견하여 고명과 인신(印信)을 요청하였다(『태조실록』 4년 11월 11일).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주청문의 내용과 표현이 공손하지 못하다고 트집을 잡아 이를 거절하였다(『태조실록』 5년 3월 29일).
태조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정종 또한 친명정책을 추진하고 1400년(정종 2) 9월 판삼사사우인열(禹仁烈)과 첨서 이문화(李文和)를 명나라에 보내어 고명과 인신을 요청했다.(『정종실록』 2년 9월 19일) 이에 건문제(建文帝)가 고명과 인신을 보내고 사신을 파견하였으나, 떠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정종이 갑자기 왕위를 아우에게 양위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건문제는 조선의 내부사정에 의심을 품고 조선으로 가던 사신을 중도에 불러들여 결국 정종도 명나라로부터 고명과 인신을 받지 못하였다. 조선에서 처음으로 고명과 인신을 받은 것은 개국 이후 10년이 지난 1401년(태종 1) 6월이었고(『태종실록』 1년 3월 6일), 명나라에서 책봉한 공식 명칭은 조선국왕으로 인문 또한 조선국왕지인이었다.
전근대에는 인장에 사용하는 글자에 엄격한 구분을 두어 제후국인 조선에서는 국새에 ‘새’나 ‘보’ 자를 사용할 수 없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명·청으로부터 받은 공식 국새는 모두 조선국왕지인으로 ‘인(印)’ 자를 사용하였고, 손잡이 부분인 뉴(鈕)는 신하의 도리를 상징하는 거북으로 제작되었다. 이후 명나라로부터 두 차례 더 국새를 받았으나 인문, 서체, 포치 등이 모두 이전과 동일하였다. 서체 면에서는 매 글자마다 가로획의 수가 9획이 되도록 의도적으로 구성한 것이 특징이며, 이러한 서체를 구첩전(九疊篆)이라 부른다.
1401년(태종 1) 처음으로 고명과 대보를 받은 이후 명나라에서는 건문제가 삼촌 영락제(永樂帝)와 3년간 싸우다가 결국 패배하여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건문제의 뒤를 이어 영락제가 3대 황제에 올랐다. 명나라에 새로운 황제가 등극한 것을 계기로 태종은 영락제에게 하륜(河崙)을 보내 축하의 뜻을 표하는 동시에 새로운 고명과 인신을 요청하였고, 영락제는 곧바로 고명과 인신을 내주었다. 하륜이 이를 가지고 한양에 도착했을 때가 1403년(태종 3) 4월이었다(『태종실록』 3년 4월 2일).
후대의 기록에 의하면 이때 인수한 국새는 금제귀뉴(金製龜鈕)로 동북의 제후국 책봉 때에 금으로 제조하며 거북 손잡이로 하는 한제(漢制)를 따랐다고 하였다(『숙종실록』 38년 10월 26일). 이를 계기로 태종은 1401년 건문제로부터 받은 고명과 국새를 1403년에 반납하였다. 태종은 고명과 인신을 받음으로써 왕권 안정에 많은 도움이 되었고, 영락제도 등극 과정에 약점을 갖고 있던 터라 태종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로부터 조선시대의 대명사대외교가 정착하였으며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도 안정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세 번째 국새를 인수한 시기는 성화 연간(成化年間, 1465~1487)으로, 명나라로부터 인수한 마지막 국새이다. 이때 받은 국새에 대한 기록은 무슨 이유인지 당대에는 찾을 수 없고, 성화 연간의 인수 사실만 정조대의 기록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정조실록』 10년 4월 11일).
중원에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조선에서는 모두 3차에 걸쳐 국새를 인수하였다. 첫 번째는 1637년(인조 15) 11월에 받은 청자(淸字), 즉 만주문으로 새긴 국새였다. 두 번째는 1653년(효종 4) 인수하였으며 ‘조선국왕지인’의 한자와 청자를 한 인장에 넣었다. 한자는 소전(小篆)이며 청자는 아직 전서화(篆書化)되지 않았다. 세 번째는 1776년(영조 52) 인수하였으며 한자와 청자가 모두 전서이고 지영전(芝英篆)으로 하였다.
세 번째 국새를 인수하기 앞서 청나라에서는 태학사(太學士)부항(傅恒)의 건의에 의하여 청나라 외의 모든 제후국 국새는 ‘청서한자(淸書漢字)’, 즉 청자와 한자를 모두 전서로 제작하여 다시 주조하기로 하였다. 다시 말해 조선을 포함한 제후국의 국새를 해당 국가의 왕이 왕위를 이어받을 때 청나라에서 회수하고 새로 주조하여 발급하기로 한 것이다[『정조실록』 즉위 8월 18일 1번째기사]. 그러므로 1776년 청나라에서 보낸 세 번째 국새에는 청자와 한자가 모두 전서의 일종인 지영전으로 되어 있다. 앞의 1653년(효종 4)에 받은 국새의 형상과 달라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당률소의(唐律疏義)』
- 성인근, 『한국인장사』, 다운샘, 2013.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編, 『寶印所儀軌』, 학연문화사, 2004.
- 李善洪, 「朝鮮時代 對中國 外交文書 硏究」,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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