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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27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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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간의대 |
한글표제 | 간의대 |
한자표제 | 簡儀臺 |
상위어 | 천문학 |
관련어 | 정방안(正方案) |
분야 | 문화/과학/천문 |
유형 | 물품·도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시대 |
왕대 | 조선시대 |
집필자 | 전용훈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간의대(簡儀臺)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15년 7월 21일 |
조선 세종대 천체의 위치 관측에 사용하는 간의라는 기구를 설치한 관측대.
개설
조선 세종대 조선의 시각(時刻) 제도를 확립하기 위해, 천문학에 관련한 제반 제도를 정비하였다. 이때 중국의 역대에 나온 천문학 및 역법(曆法) 이론을 연구하고, 천문 관측기구를 정비하였다. 또한 간의(簡儀)라는 관측기구를 설치한 천문 관측대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간의대(簡儀臺)이다. 간의(簡儀)는 13세기 말 원(元)나라에서 수시력(授時曆)을 개발할 때 만든 관측기구로, 눈금을 새긴 원환(圓環) 위를 회전하는 가늠자를 이용하여 천체의 위치를 관측하였다.
연원 및 변천
간의대는 조선 세종 때에 경회루(慶會樓)의 북쪽에 설치되었다. 명칭의 의미는 ‘간의를 설치한 대(臺)’이지만, 기록에 따르면 동서남북의 방향을 정하는 데 사용한 정방안(正方案)이라는 기구도 간의와 함께 설치하였다(『세종실록』 15년 7월 21일). 조선시대 천문학의 제반 연혁을 다룬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에서는 간의대에 관하여 “돌을 쌓아서 만들었는데, 대의 높이는 31척, 길이는 47척, 너비는 32척이며, 둘레를 돌난간으로 둘렀으며, 대의 꼭대기에는 간의를 설치하고, 간의의 남쪽에 정방안(正方案)을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나아가 간의대를 벗어나 서쪽에는 작은 각(閣)을 세워 천체 운동 시연(試演) 기구인 혼의(渾儀)와 별자리 천구를 구현한 혼상(渾象)도 보관하였다고 하였다. 이처럼 간의대 주변에 천문 의기들을 함께 설치했기에, 간의대라고 하면 간의대는 물론 주변의 천문의기들까지 합하여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간의대의 건립은 1432년(세종 14) 세종이 정인지(鄭麟趾)에게 천문 관측기구를 제작하라고 명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관측기구에는 관측지의 북극고도(위도)가 정확히 반영되어야 하므로, 먼저 한양(漢陽)의 위도를 측정할 수 있는 기구인 간의를 나무로 만들게 하였다. 이 목간의(木簡儀)로 한양의 위도가 38도소(度少), 약 38.5도임을 측정하였고, 이 수치를 반영하여 구리로 된 간의를 만들게 하였다. 세종은 동제(銅製) 간의가 완성되어 갈 무렵, 경회루의 북쪽에 간의를 설치할 관측대, 즉 간의대를 만들게 하였다. 간의대의 최초 건립 연대는 확실치 않다. 『세종실록』에 인용된 김돈(金墩)의 『간의대기(簡儀臺記)』에 따르면, 1432년(세종 14) 7월 간의의 제작을 명했고, 1433년(세종 15) 8월에는 이미 간의대에서 담당 관원이 숙직하면서 관측을 하고 있었다고 하니, 1432년(세종 14) 말에서 1433년(세종 15) 초 즈음에 완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간의대가 처음 설치된 곳은 경회루 북쪽이었으나, 1443년(세종 25)에는 그곳에서 약간 서북쪽에 있는 신무문(神武門) 쪽으로 옮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이곳의 간의대는 몇 차례 보수된 기록이 있으며,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파괴된 후에는 그대로 방치되었던 것 같다. 경복궁이 중건된 고종대의 시점에서 볼 때, 완전히 파괴되어 터만 남은 상태였는지, 아니면 천문기구는 사라졌지만 돌로 쌓은 대는 그대로 유지되었는지 확실치 않다.
간의는 13세기 중반, 원나라에서 새로운 역법인 수시력(授時曆)을 개발하기 위해 정밀한 관측을 할 필요가 있어서 개발한 관측기구이다. 이 기구에는 각각 지평좌표와 적도좌표에 따른 관측을 할 수 있는 두 개의 관측기구가 결합되어 있다. 첫째는 지평선을 따라서 동서 방향의 각도를 재거나 지평선으로부터 남북 방향의 각도를 잴 수 있는 지평환(地平環)이다. 둘째는 적도를 따라서 동서 방향의 각도를 재거나 적도면으로부터 남북 방향의 각도를 잴 수 있는 적도환(赤道環)이다. 하늘의 기구 전체가 북극을 향하게 하고, 남북극 선에 수직으로 적도면을 설치한다. 지평환은 지평면에 평행하게 설치하면 된다. 간의와 함께 설치한 정방안은 간의를 설치할 때 정확한 동서남북선을 알아내기 위해서 필요한 장치이다. 이것은 단독 관측기구라기보다는 간의를 설치할 때 정확한 방향을 설정하기 위한 보조 장치라고 할 수 있다.
형태
간의대의 높이와 대의 넓이 등 전체 규모에 대해서는 건립 당시에 사용된 척도가 논란이 되어왔다. 또한 간의대는 설치된 이후 위치를 이동하거나, 수리를 하거나, 중수(重修)한 기록 등이 단편적으로만 남아 있어서, 처음 건립한 시기나 이후의 수리 및 중수의 시기를 확정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최근에 여러 학자의 연구가 축적되면서, 간의대에는 간의와 정방안만 설치되었으며, 동표(銅表)·혼의(渾儀)·혼상(渾象)은 대의 주변에 설치되었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이고 있다. 또한 대의 규모를 기술할 때 사용한 척도는 1尺을 20.7㎝로 환산한 주척(周尺)을 사용한 것으로 의견이 모이고 있다. 이에 따르면, 간의대의 높이는 지면에서 약 6.4m, 윗면의 길이는 약 9.7m, 윗면의 너비는 약 6.6m 정도로 계산되며, 남북 방향으로 길게 설치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전통시대에 시각(時刻)의 표준은 특정한 별이 자오선상에 오는 남중(南中)을 기준으로 하므로 별의 위치 관측은 시각의 표준을 정하는 데에서 가장 중요하였다.
참고문헌
- 김상혁, 「조선시대 간의대의 배치와 척도에 대한 추정」, 『천문학논총』26 , 2011.
- 남문현, 「간의대의 어제와 오늘」, 『고궁문화』2 , 2008.
- 이용삼, 「세종대 간의(簡儀)의 구조와 사용법」, 『동방학지』93 , 1996.
- 전상운, 「서운관과 간의대」, 『향토서울』20 , 1964.
- 정연식, 「조선시대 관천대(觀天臺)와 일영대(日影臺)」, 『한국문화』51 , 2010.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