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주일구(懸珠日晷)"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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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26 기준 최신판



1437년(세종 19)에 제작된 휴대용 해시계.

개설

『세종실록』에 의하면 현주일구는 1437년에 제작되었으며 적도식의 백각환 시반을 갖는 해시계이다. 시표(時標)와 시반(時盤)이 수직이 되도록 기둥에 추를 매달아 십자(十字)의 중심에 걸리게 하고, 남북을 정하기 위하여 자침(磁針)을 두었으며, 시표는 세선(細線)이 3각형을 이루어 접을 수 있게 하였다. 3각형의 시표는 중세 아라비아의 영향으로 보인다.

내용 및 특징

현주일구는 1437년 4월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세종실록』 19년 4월 15일), 그 이전에 이미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제작자는 분명하지 않은데, 1432년에 세종이 예문관 제학정인지(鄭麟趾)에게 대제학정초와 함께 천문의기를 만들도록 명한 사실로 보아 정인지와 정초, 이천 등이 제작 과정을 전담했을 것으로 보인다.

세종 때 만들어진 해시계로는 현주일구 외에도 앙부일구(仰釜日晷)·천평일구(天平日晷)·정남일구(定南日晷) 등이 있었다. 그러나 세종 때 만들어진 것은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었다. 이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앙부일구만이 숙종 연간에 제작된 것이 남아 있다. 그러나 현주일구와 천평일구는 전혀 전해지는 바가 없어 그 모양을 정확히 알 수 없다. 그중 현주일구는 중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세종 때 유일하게 만들어진 해시계로, 다행히 그 모양이 문헌 기록으로는 남아 있어서 대략이나마 그 구조를 짐작할 수 있다.

형태

현주일구는 사각형의 휴대용 해시계로 크기가 6촌 3푼밖에 되지 않는다. 평평한 바닥 북쪽에 기둥을 세우고 남쪽에는 못[池]을 팠으며, 북쪽에는 십자 표지를, 그리고 기둥머리에 추를 달아서 아래쪽 십자와 서로 닿게 하여 시계가 수평임을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시반 중심 한가운데에 지름이 3촌 2푼인 작은 원을 그려 100각(刻)을 표시해두었다. 100각을 그린 것은 당시의 시제(時制)가 1일(日)은 100각이라는 데에 따른 것이다.

100각이 그려진 원의 가운데에 구멍이 있어 한 가닥 가는 실을 꿰어서 위는 기둥 끝에 매고 아래는 밑바탕 남쪽에 매어 실 그림자가 있는 것을 보고 시각을 알 수 있게 하였다. 흐린 날에는 시각을 알기 어려우므로 행루(行漏)를 만들었는데, 행루는 파수호(播水壺)와 수수호(受水壺)가 각각 하나씩이 있었다.

현주일구란 명칭이 붙은 것은 수평을 잡기 위해 매달아둔 추 때문으로 보인다. 앙부일구와 달리 휴대하기 간편한 시계로 자오(子午)를 정확히 하기 위해 지남침과 함께 사용했으리라는 추측도 있다. 세종 때 여러 개의 현주일구를 만들어 양계(兩界)에 나누어 주고 남는 것은 서운관(書雲觀)에 보관했다고 한다.

변천

현주일구는 현재 남아 있는 것이 없어 세종대 원래의 모습은 단정할 수 없다. 다만 역사 기록에 근거해 복원한 현주일구를 현재 경기도 여주의 세종대왕릉 기념관에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박성래, 「세종대의 천문학 발달」, 『세종조문화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 전상운, 「이씨 조선의 시계제작 소고」, 『향토 서울』,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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