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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품도구|대표표제=소기|한글표제=소기|한자표제=小旗|대역어=|상위어=노부(鹵簿), 노부의장(鹵簿儀仗)|하위어=|동의어=|관련어=대기(大旗), 중기(中旗)|분야=왕실/왕실의례/군례|유형=물품·도구|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왕대=|집필자=김지영|용도=|재질=|관련의례=|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6691|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da_10108030_007 『세종실록』 즉위년 8월 30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20004002_001 『세종실록』 오례 가례 서례 노부 대가의 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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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실의 노부(鹵簿) 의장에 포함된 의장기 중 가장 작은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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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명나라 때에 군인 열 명을 지휘하고 통솔하던 하급 군관.
  
 
=='''개설'''==
 
=='''개설'''==
  
조선시대에 왕이나 왕비, 세자와 세자빈, 세손과 세손빈은 각 지위에 해당하는 노부 의장을 갖추었는데, 지위에 따라 의장의 구성이나 규모에 큰 차이가 있었다. 의장은 기본적으로 여러 상징을 그린 깃발인 의장기와 무기나 왕실의 생활용품에서 유래한 의장물로 구성되었다. 의장기는 어떤 상징이 그려지는가에 따라 각각 이름이 달랐고, 색깔도 청색·적색·백색·흑색·황색 등 오색으로 차이가 있었다. 색이나 문양의 차이 외에도 의장기는 크기에 따라 세 등급으로 구분하여 가장 큰 깃발은 대기(大旗), 중간 크기의 깃발은 중기(中旗), 작은 깃발은 소기(小旗)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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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명나라의 군제인 위소제에서는 군인 10명에 소기(小旗) 하나를 세우고, 군인 50명에 총기(摠旗) 하나를 세웠다.
  
 
=='''연원 및 변천'''==
 
=='''연원 및 변천'''==
  
보통 왕만 용기(龍旗)라는 대기를 사용하여 군주권을 상징하였지만, 세종대에는 상왕인 태종이 황룡대기(黃龍大旗) 2개를 만들어 의건부(義建府) 및 삼군부(三軍府)에 나누어 두도록 하되, 상왕전의 큰 기()는 흰 바탕에 누런 선을 두르고 누런 용을 그려서 주상전의 큰 기와 다르게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0108030_007 『세종실록』 즉위년 8월 30일]). 『세종실록』「오례」 노부 항목이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노부 항목에서 의장기의 명칭 가운데 ‘대기’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는 홍문대기(紅門大旗)와 후전대기(後殿大旗)가 있고 나머지 의장기는 크기에 대한 묘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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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명나라에서는 태조 홍무제(洪武帝) 즉위 초에 모신(謀臣) 유기(劉基)의 건의에 따라 위소제를 군제로 채택하였다. 위소제에서 군대 편성 최소단위는 100호소(百戶所)로 총기(總旗) 2명, 소기(小旗) 10명, 병사 100명으로 이루어지며, 소기는 병사 10명을 거느렸다. 5,000호소로 1위()를 편성하여, 1위의 총인원수는 5,600명이었다. 『태조실록』에 “요동도사(遼東都司)에서 온 자문(咨文)에 의거하여, 사람을 보내어 소기(小旗) 이한니(李閑你) 등을 처자(妻子)까지 합쳐 23명을 잡아서 요동도사에 보냈다([http://sillok.history.go.kr/id/kaa_10302019_001 『태조실록』 3년 2월 19일]).”라는 기록이 나오는 등 조선초기 『조선왕조실록』에 소기 직급을 가진 무관이 다수 등장한다.
 
 
큰 기[大旗]는 1인이 쥐고 2인이 이끌고 2인이 좌우에서 잡으며, 보통 기[中旗]는 1인이 쥐고 2인이 이끌며, 작은 기[小旗]는 1인이 쥐고 1인이 이끄는데, 모두 청의(靑衣)에 피모자(皮帽子)를 착용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20004002_001 『세종실록』 오례 가례 서례 노부 대가의 노부]). 노부에 속한 깃발을 들 때 그 크기에 따라 기를 잡는 사람 외에 보조하는 사람의 수를 달리한 것이다. 대기는 5인, 중기는 3인, 소기는 2인을 각각의 깃발에 배치하였다.
 
 
 
개별 의장기가 대기·중기·소기 중 어디에 해당하는지는 노부 항목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으나, 조선후기 의궤 반차도에 묘사된 것을 통해 각 의장기가 어디에 해당하는지 알 수 있다. 소기에는 육정기(六丁旗) 즉 정축기(丁丑旗)·정묘기(丁卯旗)·정사기(丁巳旗)·정미기(丁未旗)·정유기(丁酉旗)·정해기(丁亥旗)와, 백택기(白澤旗), 삼각기(三角旗), 각단기(角端旗), 용마기(龍馬旗), 현학기(玄鶴旗), 백학기(白鶴旗), 영자기(令字旗), 고자기(鼓字旗), 금자기(金字旗) 등이 해당했다. 소기를 잡는 사람과 보조하는 사람 모두 청의에 피모자를 착용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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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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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26 판



중국 명나라 때에 군인 열 명을 지휘하고 통솔하던 하급 군관.

개설

중국 명나라의 군제인 위소제에서는 군인 10명에 소기(小旗) 하나를 세우고, 군인 50명에 총기(摠旗) 하나를 세웠다.

연원 및 변천

중국 명나라에서는 태조 홍무제(洪武帝) 즉위 초에 모신(謀臣) 유기(劉基)의 건의에 따라 위소제를 군제로 채택하였다. 위소제에서 군대 편성 최소단위는 100호소(百戶所)로 총기(總旗) 2명, 소기(小旗) 10명, 병사 100명으로 이루어지며, 소기는 병사 10명을 거느렸다. 5,000호소로 1위(衛)를 편성하여, 1위의 총인원수는 5,600명이었다. 『태조실록』에 “요동도사(遼東都司)에서 온 자문(咨文)에 의거하여, 사람을 보내어 소기(小旗) 이한니(李閑你) 등을 처자(妻子)까지 합쳐 23명을 잡아서 요동도사에 보냈다(『태조실록』 3년 2월 19일).”라는 기록이 나오는 등 조선초기 『조선왕조실록』에 소기 직급을 가진 무관이 다수 등장한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인조부묘도감의궤(仁祖祔廟都監儀軌)』
  • 『경종왕세자책례도감의궤(景宗王世子冊禮都監儀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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