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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26 기준 최신판



중국진시황이 처음 제작하여 역대로 왕위계승의 상징으로 인식한 제왕의 인장.

개설

제왕의 인장으로 전국새(傳國璽), 전국보(傳國寶), 진새(秦璽) 등의 다른 이름이 있다. 예로부터 제왕은 하늘로부터 명을 받아 임명된다고 여겼으므로 제왕의 인장을 수명보(受命寶)라 일컬었다.

연원 및 변천

수명보의 전통은 진시황이 화씨벽(和氏璧)이란 귀한 옥을 얻어 이사(李斯)에게 전서(篆書)를, 손수(孫壽)에게 조각을 명하여 ‘수명어천(受命於天) 기수영창(旣壽永昌)’ 8글자로 만들면서 시작하였다. 이 전통이 대대로 전해지면서 수명보는 왕위계승의 상징물이 되었다. 『구오대사(舊五代史)』에 의하면, 후당(後唐)의 마지막 황제인 이종가(李從珂)가 수명보를 몸에 지니고 분신하면서 소실되었다고 전해진다. 진(晉)고조(高祖)는 특별히 황제수명보(皇帝受命寶)를 만들었는데, ‘수천명명(受天明命) 유덕윤창(惟德允昌)’이란 글귀를 새겼다. 『요사(遼史)』에 의하면 요나라가 망하자 수명보를 상건하(桑乾河)에 버렸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왕위의 전수과정에서 국새의 다른 이름으로 수명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1623년(인조 1) 3월 인조는 의병을 일으켜 왕대비를 복위시킨 다음 대비의 명으로 경운궁(慶運宮)에서 즉위하면서 광해군을 폐위시켜 강화도로 내쫒고, 이이첨(李爾瞻) 등을 처형한 다음 전국에 대사령을 내렸다. 당시 인조가 즉위하면서 기존 국새의 인수에 대한 논의 과정에서 수명보를 언급한 기록이 있다(『인조실록』 1년 3월 13일). 사실 조선에서 ‘전국(傳國)’이나 ‘수명(受命)’이란 용어를 쓴 국새는 제작된 적이 없었으므로 이때에는 국새를 가리키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국새는 대부분 명(明)·청(淸)의 황제들이 책봉과 동시에 사여하였고, 국왕문서용 국새는 국내에서 제작하였다. 1392년(태조 1)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고려의 국새를 명나라에 반납하고, 새로 내려주기를 여러 차례 요청하였다. 그러나 태조 당대에는 실현되지 않았고, 태종대에 금으로 만든[金製]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을 받았다. 이 국새는 인조 대까지 주로 명나라와의 외교문서에 사용하였으며, 이후 중국으로부터 두 차례 더 인수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이후에는 청나라에서 사여한 국새를 사용하였다. 따라서 인조반정 과정에서 거론된 수명보는 명나라로부터 받은 조선국왕지인임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성인근, 『한국인장사』, 다운샘. 2013.
  • 이수웅, 『역사 따라 배우는 중국문학사』, 다락원, 2010.
  • 葉其峰, 『古璽印通論』, 紫禁城出版社,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