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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23 기준 최신판



옥(玉)으로 제작한 보인(寶印)을 이르는 말.

개설

조선시대의 어보는 금·은·옥의 재질로써 신분별 차등을 두었으며, 옥으로 제작한 경우 신분에 따라 옥보(玉寶)·옥인(玉印) 등을 제작하였다. 조선시대 유물을 통해 책봉보인을 살펴보면 왕비의 경우 금으로, 왕세자 이하는 모두 옥으로 제작하였는데, 왕비에 대한 위격(位格)과 그 자손에 대한 신분적 차별을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 책봉보인에서는 옥보다는 금을 상격(上格)으로 인식하였다고 할 수 있다.

연원 및 변천

중국의 인장은 한대(漢代)로부터 금보다는 옥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전통은 진시황이 남전산(藍田山)에서 화씨벽(和氏璧)이라는 귀한 옥을 얻어 ‘수명어천(受命於天) 기수영창(旣壽永昌)’ 8글자를 새겨 전국새(傳國璽)로 삼으면서부터 시작하였다. 여기서 유래하여 지금도 국새를 ‘옥새(玉璽)’라고 부르는데, 화씨벽으로 시작된 전국새의 전통이 면면히 이어진 결과로도 여겨진다.

조선시대 책봉보인의 경우 옥보다는 금을 좀 더 상격으로 인식하였지만, 존호보·시호보·묘호보 등 존숭과 추숭의 측면에서는 금과 옥의 재질상 차별성은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다. 세종대에는 옥을 상서로운 물질로 여겨 옥이 생산된 일로 국왕에게 하례한 일도 있었다(『세종실록』 26년 10월 5일)

왕실의 보인(寶印)을 옥으로 제작할 경우에는 지금의 화성지역인 경기도 남양에서 산출되는 남양옥(南陽玉)을 선호하였다. 인장은 물론 편경, 옥책 등 왕실의례 관련 물품에 흔히 사용되었다. 광해군대 이후 옥을 캐기 위해 옥장(玉匠)이나 차사원(差使員)을 남양으로 보낸 사례가 흔하다.

조선시대에는 내치용 국새 가운데 몇몇을 옥으로 제작하였다. 기존에 주로 교지(敎旨)에 찍었던 시명지보(施命之寶)를 세조대에는 ‘시명(施命)’ 2글자를 옥에 새겨 사용하였고(『세조실록』 12년 1월 10일), 유서(諭書)에 찍는 ‘유서보’를 옥으로 제작하였다(『연산군일기』 1년 6월 14일).

참고문헌

  • 『채옹(蔡邕)』
  • 『독단(獨斷)』
  • 성인근, 「조선시대 어보(御寶)의 상징체계 연구」, 『온지논총』38집, 2014.
  • 한국사전연구사편집부, 『종교학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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