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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20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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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수차 |
한글표제 | 수차 |
한자표제 | 水車 |
상위어 | 수리(水利), 농구(農具) |
관련어 | 답차(踏車), 당수차(唐水車), 염전(鹽田), 옥형(玉衡), 왜수차(倭水車), 용골차(龍骨車), 용미차(龍尾車), 자격수차(自激水車), 통륜(筒輪), 항승(恒升) |
분야 | 문화/과학 |
유형 | 물품·도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염정섭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수차(水車) |
인력(人力)이나 축력(畜力), 또는 다른 동력으로 바퀴를 돌리고, 바퀴의 회전력과 물을 담은 나무통을 이용하여 낮은 곳에 위치한 물을 높은 곳의 농지로 끌어 올리는 데 사용한 기계장치.
개설
조선시대의 수차(水車)는 주로 수리 관개에 사용한 기계장치를 가리킨다. 하천수를 관개수로 이용하는 수리 도구인데 조선전기에 도입이 추진되었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이앙법이 활발하게 보급된 중국 강남 지역에서는 논에 물을 끌어오고 내보내는 데 수차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지만, 조선의 토질에는 적합하지 않아 도입이 무산된 것이다. 중국과 일본에서 이용되고 있던 수차를 조선에서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조선후기 들어 수리 지식과 기술에 대한 연구가 축적되고, 이와 더불어 서양식 수차에 대한 정보가 전해지면서 수차 도입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실제 농사에 활용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연원 및 변천
조선전기에 수차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몇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세종대에 통신사(通信使)박서생(朴瑞生)의 주장에 따라 수차를 제작하고 보급시키려 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수차를 움직여 물을 끌어 올렸지만 물이 즉시 삼루(滲漏)되어 수차를 이용한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조선의 토성이 삼루가 심해서 들어가는 공력에 비해 관개 효과가 적었던 것이다. 세종은 일본에서 통용되던 왜수차(倭水車) 외에 중국의 수차인 당수차(唐水車)의 제작 보급에도 주의를 기울였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결국 자원하는 사람들에게 수차를 사용하도록 하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성종대에는 명나라 강남 지역으로 표류되었다가 육로로 조선에 돌아온 최부의 견문록에 의거하여 수차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또한 연산군대에는 김익경이 정교한 수차를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당시 제작된 수차들은 수리 관개에서 본격적으로 활용되지는 못하였다.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도 수차를 제작하여 보급하려는 시도가 계속 이루어졌다. 효종대에 적극적으로 수차를 보급하려는 시도가 전개되었다. 정조대까지도 수차 제작 및 보급을 위해 지속적인 노력이 이루어졌으나, 다만 유제(遺制)로 기억될 뿐이었다. 숙종대에는 서양식 수차에 대한 관심도 있었다. 영조대에는 앞선 시기에 만들어진 수차를 수리하여 삼남 지역에 내려보내는 조처가 취해지기도 하였다. 정조대에도 대천수(大川水)를 관개에 활용하는 수리도구인 수차의 제조·보급이 여러 차례 시도되었다. 또한 박지원 등 실학자들은 수차의 사용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중국식 수차와 서양식 수차의 도입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조선초기 이래의 수차 도입 시도는 별다른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논의만 진행되는 데 그치고 말았다.
형태
수차의 형태는 동력원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다. 다만, 핵심 장치는 인력이나 축력이 회전 장치에 전달될 수 있게 해주는 부분이다. 낮은 곳의 물을 담아서 높은 곳으로 올려 보내는 물통에 해당하는 곳이 중요한 부분이다. 수차 가운데 가장 간단한 형태의 것은 답차(踏車)인데, 사람이 발로 밟아 돌리는 물레바퀴를 갖춘 수차였다. 주로 염전 지역에서 많이 사용하였다.
참고문헌
- 문중양, 「조선후기의 수차」, 『한국문화』15, 1995.
- 문중양, 『조선후기 수리학과 수리담론』, 집문당, 2000.
- 이태진, 「조선시대 水牛·水車 보급 시도의 농업사적 의의」, 『천관우선생환력기념한국사학논총』, 정음문화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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