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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3:15 기준 최신판



조선후기에 균역법의 시행으로 토지 1결에서 미 2두 혹은 전 5전을 걷는 세금.

내용

1750년(영조 26)에 실시된 균역법은 군역(軍役)의 폐해를 개선하기 위한 일환으로 군포(軍布) 2필을 1필로 줄였다. 그로 인하여 줄어든 총액이 500,000여 필(돈 약 1,000,000냥)에 달하여 재정 체계를 개편하게 되었다. 그와 관련하여 중앙 아문과 지방 영진의 지출을 500,000여 냥 줄였지만, 군수비 400,000여 냥을 줄일 수 없어 다른 재원으로 보충해야만 했는데 이를 급대(給代)라고 하였다. 이 군수비 400,000여 냥을 충당하기 위하여 어염선세(魚鹽船稅)·선무군관포(選武軍官布)·은여결세(隱餘結稅)를 거두었지만 100,000여 냥에 불과하였다. 나머지 300,000여 냥을 보충하기 위하여 결작(結作)이라는 세목(稅目)을 신설하였다.

결작이란 평안·함경 양도를 제외한 6도의 토지에서 1결당 쌀 2말 또는 돈 5전을 내도록 한 것이었다. 평년의 결수(結數)로 계산하면 대략 결작 수입이 300,000여 냥이 되었다. 이 300,000여 냥은 균역청에 납부되어 군수비 급대 재원으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결작 시행으로 평민이 부담하는 군역의 일부가 토지를 소유한 양반에게 옮겨졌다.

용례

結米節目始成 啓下頒布 其略曰 (중략) 不得已西北兩道外 就六道田結 每一結收米二斗或錢五錢 今以常年田結計之 勿論米錢 折計可爲三十餘萬兩 要令給代不足之數 約略相當(『영조실록』 28년 1월 13일)

참고문헌

  • 『균역사실(均役事實)』
  • 『균역청사목(均役廳事目)』
  • 『균역청등록(均役廳謄錄)』
  • 정연식, 「均役法 시행 이후의 지방재정의 변화」, 『震檀學報』 67, 1989.
  • 정연식, 「18세기 結布論의 대두와 結米節目의 제정」, 『國史館論叢』 47, 1993.
  • 정연식, 「17·18세기 良役均一化政策의 推移」, 『韓國史論』 13, 1985.
  • 차문섭, 「壬亂以後의 良役과 均役法의 成立」 上·下, 『史學硏究』 10·11,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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