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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3:14 기준 최신판



백성들이 요역노동을 부담하는 대신에 관에 바치는 돈.

내용

조선후기 요역제 운영에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노동력을 직접 징발하는 대신에 현물이나 화폐로 대납하는 방식이 점차 보편화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조선후기의 지방관들은 역사가 있을 때마다, 응역할 수 없는 민호에서 궐전(闕錢)을 거두어들이거나, 혹은 처음부터 방고전(防雇錢)·방가(防價)·방역전(防役錢)·민전(民錢)이라는 이름으로 대가를 징수하는 일이 많았다. 당시의 농민층은 국가의 가혹한 노동력 수탈 체계에서 자유로워진 반면, 잡역세 등의 물납세를 새로이 부담하게 되었다.

18·19세기의 사정을 보여 주는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는 당시의 요역의 종목 중에 둑 쌓기[築堰], 도랑 파기[鑿渠], 저수지 준설[浚湖], 상여 메기[擔轝], 목재 운반[曳木], 얼음 저장 등을 대표적인 것으로 들었다. 그러나 이 같은 요역 종목은 당시의 농민들에게 일상적으로 부과되는 것은 아니고, 거의 대납제(代納制)의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위의 각 분야의 요역은 실제로는 방고전의 징수, 호전(戶錢)·민전의 징수, 빙가미(氷價米)의 징수를 내용으로 하였다. 농민의 입장에서 보면 부정기적인 잡역세의 부담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1858년(철종 9) 경상도 동래부에서 수재를 복구하기 위해서 감영을 통하여 인근 8읍의 역정(役丁) 5,000명을 동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역사에 실제로 징발된 것은 동래부 각 면의 농민뿐이었다. 나머지 8읍의 농민은 실역(實役)에 징발되지 않는 대신 각기 2전~2전 5푼의 방고전을 바치게 하였다. 당시에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이처럼 방고전은 부정기적인 잡역세로 징수되었으며, 이로써 인부를 고용하는 재원으로 삼을 수 있었다.

용례

正言柳復明上書 有曰 (중략) 仍及近日時弊二十餘條 其一 經理廳料辦之弊也 (중략) 貢物年條 以輕價而預爲買得 當其輕買之際 從中勒取 不無其弊 諸般債物 以甲利而遍給京外 及其督徵之時 田土文券 亦多見奪 諸道義僧 多至三百五十名 而徵以除番之錢 樓巖別將 濫捧無名之船稅 兩西喬桐 勒定紙地之防納 其他空名之帖防雇之事 或多繹騷 或涉零碎 大抵任事之輩 憑藉侵虐 雖其多辦債殖 廣占厚利 而不歸公家 半入私橐 昔之貧乏者 今則暴富 昔之無家者 今則廣室 可勝痛哉 (하략) (『숙종실록』 44년 윤8월 3일)

참고문헌

  • 『목민심서(牧民心書)』
  • 윤용출, 『조선후기의 요역제와 고용노동』,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