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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3:14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 과거 시험 중 생원진사시의 또 다른 이름.

개설

생원시와 진사시를 합하여 부를 때 사마시(司馬試) 또는 소과(小科)라고 하였다. 사마시는 3년마다 정기적으로 설행하는 식년시와 국가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축하하기 위하여 실시하는 증광시로 구분되었다. 식년 사마시와 증광 사마시는 시행 시기만 다를 뿐 시험의 절차와 내용은 같았다. 생원시와 진사시는 항상 같이 설행하였는데 시험 절차는 같고 시험 과목이 달랐다.

제정 경위 및 목적

문과는 관리 선발이 목적이지만 사마시의 목적은 학문을 장려하는 데 있었다. 사마시 합격자에게는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주었고 성균관에서 원점 300점을 취득하면 문과에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원칙이 반드시 지켜지지는 않았다. 생원·진사가 된 후에도 성균관에 입학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유학(幼學) 신분으로도 문과에 응시할 수 있었다. 사마시는 입사(入仕)와 무관하였지만 선비들은 사마시 합격을 문과 합격으로 가는 징검다리로 여겨 명예롭게 생각하였다.

내용

사마는 조선초 훈련관의 종4품 무관직이었다(『태조실록』 1년 7월 28일). 1394년(태조 3)에는 제위(諸衛)의 장군을 사마라 하였다(『태조실록』 3년 2월 29일). 이는 주(周)나라 제도에 군사를 맡은 관원을 사마라 한 데서 연유하였다(『태종실록』 9년 11월 14일).

무관직의 하나였던 사마가 생원·진사를 지칭하게 된 것은 주나라 제도에 조사(造士)는 향학에서 국학으로 오르고 국학에서 사마에 오르는 것을 진사라 하였는데 이를 모방한 것이었다. 생원·진사는 주나라의 조사에 해당하며 문과 출신은 주의 진사에 해당하므로 문과를 사마시라 해야 옳은데 소과를 사마시라 한 것은 소과의 격을 높이기 위해서였다고 보는 연구자도 있다.

사마시라는 용어는 조선초부터 썼다. 1405년(태종 5) 의정부(議政府) 찬성사(贊成事)곽추(郭樞)의 졸기(卒記)에 곽추가 일찍이 사마시를 관장하여 선비를 매우 잘 뽑았다는 기록이 있었다(『태종실록』 5년 7월 6일).

사마시가 생원진사시를 합칭하는 말이지만 조선초 약 60년간은 진사시가 설행되지 않고 생원시만 설행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사마시는 생원시만을 지칭하였다. 1393년(태조 2) 과거에서 설행된 생원시는 감시라 불렸다. 이후 1894년(고종 31) 과거제가 폐지되기까지 502년간 설행된 사마시는 식년시 163회, 증광시 67회로 모두 230회였다.

정기적인 시험인 식년시가 결행된 것은 심한 가뭄과 임진왜란·병자호란으로 인한 5회뿐이었다. 태종 즉위 기념으로 처음 실시한 증광시는 선조 이전에는 즉위 원년에 한 번 시행하였다. 선조대부터 나라에 크고 작은 경사가 생기면 이를 축하하기 위하여 증광시를 시행하였는데 후기로 가면서 명분이 늘어나고 설행 빈도가 잦아졌다. 존호(尊號)를 올리거나 태자의 탄생과 왕비·왕세자의 책봉, 세자의 입학·가례(嘉禮), 원자(元子)·원손(元孫)의 탄생 등 국가의 경사를 치를 때마다 증광시를 실시하였다. 경사가 합쳐질 때는 대증광을 설행하였다.

변천

사마시의 합격 정원은 생원시에 100명, 진사시에 100명이었다. 19세기 이전까지는 잘 지켜졌으나 19세기 후반 철종 연간부터 증가하기 시작하여 고종 말년에 가서는 크게 늘어났다. 생원의 증가보다 진사의 증가가 두드러졌다. 이는 생원보다 진사를 더 선호한 경향이 반영된 것이었다. 1891년(고종 28) 증광시에서는 생원 238명, 진사 559명을 뽑았고, 마지막 과거인 1894년에는 생원 278명, 진사 1,055명을 뽑았다.

참고문헌

  • 최진옥, 『조선시대 생원진사연구』, 집문당, 1998.
  • 조좌호, 「이조사마시고」(상), 『성균관대학교논문집 인문사회계』 제14집 ,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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