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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3:14 기준 최신판



조선초기 공물의 종류·수량을 정하고 공안을 작성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 관청.

개설

공부상정도감은 1392년(태조 1) 10월에 설치되었다(『태조실록』 1년 10월 12일). 이곳에서는 고려말 이래 누적되어 온 공납의 폐단을 제거하고 각 지방의 산물에 의거하여 공부(貢賦)의 등급을 새로 정하여 상납할 액수를 조정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태조이성계는 고려말부터 누적되어 온 공납의 폐단을 없애고 그 모순을 바로 잡기 위해 조선왕조 개국 직후인 1392년 10월에 공부상정도감을 설치하였다. 공납제의 개선 내용은 첫째, 고려왕조의 공안에 의거하여 세입의 많고 적음과 세출의 경비를 따져 손익을 참작해 오랫동안 쌓인 폐단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폐단을 제거하는 일환으로 고려말 백성에게 원성을 샀던 횡렴(橫歛)·예징(預徵)·가징(加徵)·공물 대납 등을 금지하였다. 아울러 공부의 납부액을 줄이는 조처로 백성에게 부가되었던 조포(調布)·공부·호포·상요(常徭)·잡공(雜貢) 등의 잡다한 현물세를 대폭 정리하여 공부 한 가지로 규정하였다. 둘째, 전적(田籍)을 상고하여 그 토지의 물산을 분별하고 공부의 등급을 마련해서 상납할 액수를 정하는 것이었다.

내용

1392년에 설치한 공부상정도감에서는 고려시대 공물을 거두는 근거가 된 공안의 내역을 검토하고, 공물제도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없애도록 하였다. 그리고 각 지역의 토산물과 토지의 면적을 기준으로 각 지방에서 중앙정부에 내야 할 공물의 품목과 수량을 정하였고, 이를 토대로 조선왕조 최초의 공안을 마련하였다. 이때 고려시대보다 적게 거두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고, 공물의 품목은 상공(常貢)과 별공(別貢)으로 구분하였다. 그 지방에서 생산되는 것 중 해마다 공물로 내야 할 품목과 수량을 정하여 상공으로 정하고, 상공으로 하기에 적절하지 못한 특산물은 별공으로 하여 관청의 수요에 따라 수시로 거두게 하였다. 이때 별공으로 지정된 것으로는 귤·유자 등이 있었다.

변천

1401년(태종 1) 5월 여러 창고·궁사(宮司)·호조·공조·광흥창 등에서 거둘 공물의 수량을 정하였다(『태종실록』 1년 5월 3일). 1408년(태종 8) 9월에는 제주, 1413년(태종 13) 11월에는 함경도·평안도에서 공물로 낼 품목과 수량을 정하여 조선전기 전국에 걸친 공납제도를 마련하였다. 성종 이후에는 공안상정소(貢案詳定所)(『성종실록』 25년 9월 7일) 또는 공안상정청(貢案詳定廳)을 설치하여 공물의 부과·징수를 주관하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따르면 1494년(성종 25) 공안상정소, 1501년(연산군 7)과 1604년(선조 37) 공안상정청이 각기 설치되었다(『연산군일기』 7년 4월 15일)

참고문헌

  • 田川孝三, 『李朝貢納制の硏究』, 東洋文庫, 1964.
  • 이정희, 「고려후기 수취체제의 변화에 대한 일고찰: 상요(常요)·잡공(雜貢)을 중심으로」, 『부산사학』 22, 1992.
  • 박도식, 「조선전기 공납제 연구」,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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