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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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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감영곡 |
한글표제 | 감영곡 |
한자표제 | 監營穀 |
동의어 | 영곡(營穀), 영별회(營別會) |
관련어 | 별회(別會), 진분(盡分), 별환(別還) |
분야 | 경제/재정/환곡 |
유형 | 법제·정책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현종~고종 |
집필자 | 문용식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감영곡(監營穀)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정조실록』 13년 4월 1일 |
감영에서 관리하는 환곡.
내용
별회는 감영·병영·수영에서 운영하는 환곡인데 그중 감영에서 운영하는 환곡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비용 조달을 위하여 보유 곡물 모두를 분급하는 진분(盡分)의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감영곡은 별회와 마찬가지로 감사가 자체적으로 관리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어서 조정에서 환곡을 점검할 때에도 점검 대상이 아니었다. 또한 흉년이 들었을 때에 환곡의 징수를 연기하거나 탕감하라는 명령이 내려질 경우에도 징수의 연기나 탕감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감영곡이 호조 환곡인 원회와는 그 성격이 달랐기 때문이다.
감영곡은 감사가 비교적 자유롭게 사용할 수가 있어서 객지에 임시로 머무르는 사대부들을 진휼하기 위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 경우는 환곡의 분급 규정에 의하여 환곡을 받지 않고 감사와의 친분 관계를 빌미로 환곡을 받는 별환(別還)에 해당하였다.
감영곡의 액수는 1797년(정조 21) 전체 환곡 9,380,000여 석의 19%인 1,780,000여 석에 달하였다. 1809년(순조 9)에는 2,100,000여 석에 이르렀다. 특히 남쪽에서는 전라도와 경상도가 330,000여 석과 450,000여 석을 차지하였고, 북쪽에서는 평안도와 함경도가 200,000여 석과 420,000여 석의 액수를 기록하였다. 18세기 후반에 전국의 환곡 총액은 약 10,000,000석으로 고정된다고 파악되는 데, 진휼적 성격이 강한 호조 원회곡이나 상진곡은 감소하는 데 비해, 비용 조달을 목적으로 한 감영곡은 증가하는 추세였다. 이는 환곡의 재정 기능이 강화되는 상황을 반영하였다.
용례
至若元會穀, 則折半分留, 比營穀加倍, 而監營穀, 則自是盡分者也 (『정조실록』 13년 4월 1일)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문용식, 「18세기 환곡 운영의 변화」, 『사학연구』 55·56合集, 1998.
- 문용식, 『조선후기 진정과 환곡운영』, 경인문화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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