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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3:12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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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진두 |
한글표제 | 진두 |
한자표제 | 賑斗 |
상위어 | 구휼(救恤), 진휼(賑恤), 황정(荒政) |
관련어 | 마질(馬疾) |
분야 | 경제/재정/환곡 |
유형 | 법제·정책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문용식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진두(賑斗)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정조실록』 14년 4월 7일, 『정조실록』 14년 4월 7일 |
흉년이 들어 굶주린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줄 때 사용하던 10되들이 용기.
개설
흉년이 들어 곡물을 무상으로 나누어 줄 때에는 정확한 양을 신속히 분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곡식 분급 과정에서 실무자의 부정을 방지하고, 빠른 곡물 지급을 위하여 진제장에서 사용할 용기를 따로 만들었는데 이것을 진두(賑斗)라고 하였다(『정조실록』 14년 4월 7일).
내용
18세기 중반에 이르러 흉년이 들었을 때 무상분급의 액수는 성별과 나이에 따라 달랐다. 1일당 16~50세의 남자에게는 5홉, 51세 이상의 남녀와 16~50세의 여자에게는 4홉, 11~15세의 남녀에게는 3홉이 지급되었다. 10일에 1번씩 지급하였으므로 성인 남자의 경우 쌀로 5되, 벼로 환산하면 1말 이상을 지급받았다. 또한 진제장에서 곡식을 지급할 때에는 이웃에 함께 사는 사람들 4명을 합하여 1명이 진제장에 들어와 대표로 곡식을 받아가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정확한 용량의 곡식을 지급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진두는 관에서 사용하는 표준 용량의 관두(官斗)를 사용하도록 하였으나, 실제로는 관공서와 민간, 지역 간에 진두의 용량이 달라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정조실록』 14년 4월 7일). 일부 지역에서는 전세를 걷는 말과 진휼곡을 나누어 주는 말이 다르기도 하였고, 환곡을 분급하는 말과 거두는 말의 용량이 다른 경우도 있었다. 또한 같은 고을에서도 관아에 설치한 진제장과 읍치 밖에 설치한 진제장인 외장(外場)의 관두가 다르기도 하고, 면(面)과 면에서 사용하는 용기가 다르기도 하였다. 특히 1명이 4명의 몫을 받아 와서 분배하기 때문에 같은 가족이 아닌 경우에는 곡식 액수를 두고 분쟁이 발생할 소지가 있었다.
곡식을 나누어 줄 때 기민(飢民)이 받아 갈 곡물의 양이 성별과 나이에 따라 달랐으므로 되질할 경우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렇기 때문에 대기하고 있던 기민은 추위에 떨어야 했으며, 사람이 많을 경우에는 다음 날까지 연장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폐단을 개선하기 위하여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과는 다른 진두를 따로 만들자는 방안이 제시되었다. 성인 남자, 성인 여자, 51세 이상의 남녀, 11~15세의 남녀에게 지급한 양이 다르므로 10일 분량의 용기를 각각 만들어 한 번의 마질로 분급을 끝내는 방안이었다. 또한 곡물의 종류별로 각기 따로 진두를 만들어 신속한 분배를 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만든 진두는 관에서 낙인을 찍어 그 정확함을 보장하였다. 곡식의 분급을 마친 뒤 진두는 모두 거두어 창고에 보관하고 훼손을 막아 다음번에 사용하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 『목민심서(牧民心書)』
- 『거관대요(居官大要)』
- 정형지, 「조선 후기 진급(賑給) 운영에 대하여」, 『이대사원』 26, 1992.